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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주석 및 해설/42 누가복음 주석 및 해설

누가복음 5장 12절-26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5장 12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신유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을 치유함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을 가졌던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의 친구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큐티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12절-26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5장 12절-26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5장 12절-26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5장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

구약에서 나병은 오늘날 정확한 의학 용어로 ‘한센씨병’(Hansens Disease)이라 불리는 질병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인 피부병을 모두 포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레 13:1-59). 나병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에 나병 환자들은 육체적, 사회적 및 심리적으로 격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레위기 13장에는 피부병의 일곱 가지 증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나병 환자들은 의식상(儀式上) 부정하였므로 타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부정하다’ 소리쳐야 했고, 동리 밖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 랍비들은 나병 환자가 치유받는 일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여겼다. 만일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희생제물을 바친 후 정상적인 사회로 복귀되었다(레 14:1-32). 한편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a man came along who was covered with leprosy, NIV)이라는 누가의 표현은 의사로서 병의 특성과 범위에 대하여 세심히 관찰하여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원하시면

이 나병 환자 역시 나병의 불치성(不治性)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더럽고 부정한 나병을 치료하실 의사(意思)가 있으실까’하고 다소 의구심을 지녔던 듯하다. 즉 이 나병 환자는 주께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은 믿고 있었으나 병을 고칠 의사가 있는지를 몰라 의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나병 환자의 의심을 일순간에 종결시키신다.

 

 

누가복음 5장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는 언제나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여 특별히 격리되어야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댄 것은 의미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후에 예수께서는 관(棺)을 만지기도 하셨는데(7:14) 이것 또한 의식적(儀式的)으로 금지된 행동이었다. 이처럼 예수께서 나병 환자를 손수 만지신 것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 고통받는 이의 추하고도 뼈아픈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시는 구세주의 크신 긍휼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사회와 격리 되어 폐쇄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부정한 나병 환자와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인 예수 자신과의 사이에 막혀 있던 장벽을 예수께서 무너뜨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릇된 통념(通念)과 잘못된 전통들을 뒤엎어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막힌 것을 허시고 끊어진 것을 이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

 

 

누가복음 5장 14절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예수의 명령은 4:41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공식적으로 선포되기전에 먼저 메시아로서 할 일을 하고 ‘희생적 고난’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했다. 나병 환자들을 고치는 일은 감옥에서 침례 요한이 상기(想起) 받은 바도 있는(7:22) 메시아적 표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이 백성들 사이에 알려지는 것을 경계하신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예수의 이러한 기적적 행동들을 보고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내세우는 것을 방지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제사장에게 … 보이고

깨끗함을 받은 나병 환자가 자기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는 것은 레위기 4장에 규정된 의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나병 환자를 치료한 예수의 메시아적 행동이 ‘저희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7:21-23의 주석 참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처럼 명약 관화한 메시아적 권능을 보고서도 예수를 영접하기는커녕 도리어 핍박함으로써, 그 완악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5장 15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예수의 함구령이 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것과 함께 사람들이 그 함구령을 위반하는 사례도 자주나타난다. 실로 나병은 완쾌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병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료를 포기하고 스스로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 질병이 치료되었다는 것은 만성고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곧 복음이었다. 한편 누가는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몰려왔다고 강조한다. 마샬(Marshall)은 이것을 누가가 예수의 선포 활동을 치유 활동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누가복음 5장 16절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한적(閑寂)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NIV는 이 구절의 문장 속에 ‘종종’(oft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기도하시러 가는 행동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음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원문의 ‘엔 휘포코론’(’물러가시고 있었다’)도 완곡한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귀찮아서 물러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시기 위해 잠시 물러가셨다가 또다시 나오셔서 말씀도 가르치시고 병자도 치료하시는 사역을 계속해서 반복하셨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종종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이유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됨으로 오는 폐단을 없애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즉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그 지역 사람들의 우상이 될 수도 있으며 예수 자신도 그곳에 안주하려 든다든지 아니면 그곳에 매일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위험을 피하여 종종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던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고 그 교제 가운데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방향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삶의 주 원동력이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5장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바리새인

누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교법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리새’는 ‘분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파라쉬’(פרש)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분리된 자’라고 불린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수하고 랍비들이 제정한 전통을 지켰다(막 7:3). 종교나 세속의 영역에서 세부적인 율법 규례들을 제정한 것도 그들이었다. 이와 함께 제사장 없는 회당에서 바리새인들이 평신도 예배에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성전과 제사장 직제가 없어진 후에도 바리새적인 합리주의가 계속하여 유일한 종교적 교육을 전담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세상의 종말에 있을 부활(행 23:6)과 천사의 존재를 가르쳤고, 부활 후에는 인간이 보상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메시아적 소망, 민족주의, 반로마 제국주의를 고취하였지만 그렇다고 열심당과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또한 바리새인과 예수와의 반목은 극에 달했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율법의 교훈을 무시한 데 대하여 그들은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의 죄사함이나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의 허영과 위선을 질책하셨고, 그들이 율법의 참뜻을 깨닫는데 실패했음을 힐난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에 얽매여 한쪽 방향으로만 치우쳐 매우 극단적이고 위신적으로 변해버렸다.

 

율법 교사

율법 교사는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나 말로 NIV는 ‘율법 선생들’(teachers of the law)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율법(written tradition과 oral tradition을 포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석학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경 연구와 율법 연구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을 ‘교법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어떤 특정한 종교적 일파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대의 법적 전통의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존경을 받았다. 요 5:16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이미 충돌한 바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예수의 행동을 책잡기 위해 일일이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된다.

 

병을 고치는 … 함께하더라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의 사역에서 치유의 사역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누가에게 있어서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말씀과 치유의 능력이라는 이 두 요소는 본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은 영육 간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출 15:26, 렘 30:17, 호 7:1).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아도 위대한 치료자로 묘사된 바 있다(말 4:2). 본문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음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바로 그 능력을 지닌 메시아이심을 아울러 증거 한다.

 

 

누가복음 5장 18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한 중풍병자

중풍병은 뇌일혈로 인하여 반신 또는 팔다리 등 몸의 일부나 전체가 마비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다. 환자를 메고 온 저들의 열심과 노력이 결국 환자를 치유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이 환자의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믿음의 세계란 결코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서는 것임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5장 19절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지붕에 올라가 … 달아 내리니

팔레스타인의 가옥은 대개가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집 한쪽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 있었다. 따라서 지붕에서 약간의 일상생활을 할 수가 있었고 외부인이라 하더라도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 용이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메고 사람들은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 흙벽돌로 된 지붕 기와를 벗겨내고 구멍을 내었다. 이들이 결례를 무릅쓰고 이런 행동을 감행한 것은 먼저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도 컸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병자를 사랑해 주시고 고쳐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5장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저희 믿음을 보시고

확신 있고 열심 있는 믿음은 끝내 결실을 얻게 된다. 예수는 그 믿음에 확실히 반응하신다. 예수는 행위 보다도 먼저 믿음을 보신 것이다. ‘저희의 믿음’이라고 했을 때 ‘저희’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을 말함이 분명 하나 그 가운데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돌보는 다른 자들의 중재(仲裁)에 응답하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남의 신앙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자들은 예수께서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구원은 그와 예수 사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실제로 그가 믿음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는 그를 치료하기로 선택했으며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긴박한 필요성에서 절실한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예수가 그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그 명령대로 행한 것은 그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람아 … 받았느니라

예수는 여기서 자신이 죄를 사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 병자의 죄가 ‘사함 받았다’(sins are forgiven, NIV)고 말한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겸손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는 자신들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 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선언은 죄가 그의 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은 아니다. 예수 당시에는 흔히 병의 원인이 죄라고 여겼는데 예수의 제자들 조차 그러했다(요 9:2).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는 죄와 병을 연결시키는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예수는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병자에게 보다 근원적인 질병 곧 죄의 문제로 관심을 집중토록 유도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그 구원은 영적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 육적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은 예수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영육 간의 전인적(whole personal)인 구원이다. 예수의 치유 또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누가복음 5장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신성 모독

헬라어 ‘블라스페미아’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범과(犯過)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모독일 수도 있고(계 13:6), 그의 이름, 그의 말씀(딛 2:5), 혹은 천사적 존재(유 1:8-10, 벧후 2:10-12)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때(막 2:7), 메시아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또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대 법은 이렇게 공공연하고 명백하게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신을 모독하는 자를 정죄하여 돌로 쳐 죽이는 벌을 내렸다(H. W. Beyer, TDNT. I. 621-625).

 

 

누가복음 5장 22절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비상한 통찰력으로 그들의 의논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신적 전지성(omniscience)의 일면을 볼 수가 있다.

 

 

누가복음 5장 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되물어보는 예수의 질문 속에 내포된 전형적인 ‘가언적 양도 논법’(假言的 兩刀論法, hypothetical dilemma)의 뿔에 찔려 꼼짝 못 하게 되었다(6:9).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들이 말하기에는 모두 똑같이 쉽고, 행하기에는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언급이 표면적으로는 더 쉽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반드시 외적 증거로 나타나지 않아도 되는데 반해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외적 증거가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물음의 핵심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둘 다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서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해 보이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에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데에 있다.

 

 

누가복음 5장 24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인자(호 휘오스 안드로푸)

복음서에서는 이 용어가 90여 회 나온다. 그중 본서에만 26회 나올 만큼 인자 개념은 본서의 핵심 사상이다. 요 12:34를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용어(6:5, 22, 11:30, 마 8:20, 막 14:41, 요 3:14)인 ‘인자’가 원문의 표현상 여자적(如字的) 의미로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2) 이는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상(異象) 중에 본 ‘인자’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였던 점(단 7:13)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신 예수의 대답(막 14:62)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3) 그러나 예수께서 인자로서의 종말론적 영광을 누리기 의하여서는 그 이전에 반드시 이 땅에서의 각종 수난과 죽임을 당하여야만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22:4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마 26:53) 시도 때도 없이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각종 모욕과 수난을 감내해내셨는데(4:29, 11:53, 54, 20:20, 22:63-65, 23:11) 여기에 예수께서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 칭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본 절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 참조).

 

 

누가복음 5장 25절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하나님께 영광을 … 돌아가니

중풍병자가 치료받은 것은 예수께서 난언한 말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주어진 ‘일어나 걸어가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을 따르는 일은 신앙에 바탕을 둔 순종으로써만 가능하다. 병자가 치료를 받자 그 사람 자신과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메시아의 사역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였다(2:14).

 

 

누가복음 5장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은 본서에 여러 번 나타난다(25절, 2:20, 7:16, 13:13, 17:15, 18:43, 23:47).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누가의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일을 보았다

원문은 ‘놀라운 일’을 ‘파라돝사’이라 표현하였는데 이는 ‘기대와는 반대되는’, ‘기대에는 어긋나는’(contrary to expectation)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주목할 만한’(remarkable)이라 번역한다. 영어의 ‘역설’을 나타내는 paradox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를 보건대 예수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의 기대를 뒤엎고 중풍병자를 그 즉시로 치료하시자 무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수는 그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