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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주석 및 해설/42 누가복음 주석 및 해설

누가복음 5장 1절-11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5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갈릴리(게네사렛) 호수 주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담긴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큐티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1절-11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5장 1절-11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5장 1절-11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5장 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게네사렛 호숫가

갈릴리 바다의 별칭이다. 이 외에도 이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렸는데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 수 13:27) 또는 ‘긴네롯 바다’(수 11:2)로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긴네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21:1)로 불렸다.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 km, 동서의 폭이 12 km이고 면적이 144 km에 달한다. 요단 강 수원으로부터 흘러 호수를 거쳐 흘러 내려온 맑은 물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로 이루어진 이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번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에워싸고 있는 계곡들은 비옥한 충적토(沖積土)로 덮여 있으며 날씨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하여 밀, 보리, 무화과, 포도, 야채 등의 농작물 재배에 아주 적합하다. 이 바다는 하아프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높은 산들이 둘러 서 있으므로 바다 한복판에서 이따금씩 돌풍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8:22-25, 막 주제 강해 4:35-41, ‘갈릴리 호수 조감도’ 참조). 또한 이 바다는 예수 사역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 이곳이며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이적을 행하신 곳도 이곳 해변가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동안에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에워쌌다. 군중에 둘러싸인 가운데서 예수의 말씀은 잘 전달되지 않았고 또 군중들은 예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자 자연히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리와 함께 서있던 예수는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셨다.

 

 

누가복음 5장 2절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호숫가에 두 배

예수께서는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배를 이용하기로 하셨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는 것을 보아 그 두 척의 배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배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 두 배가 모두 빈배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소득 없이 돌아왔다는 결론이 선다.

 

 

누가복음 5장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호숫가는 단구(段丘)로 둘러싸인 평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썩 훌륭한 강론(講論)의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시몬의 배에 올라 시몬에게 청하여 호숫가에서 약간 떨어진 다음 배를 설교 연단으로 삼아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함으로 1절에서보다 말씀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무리들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누가는 이 배가 시몬의 배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결국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전문 어부 시몬이었다.

 

 

누가복음 5장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깊은 데로 … 고기를 잡으라

시몬은 바닷가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였다. 반면 예수는 목수로서 생활해 오시던 분으로서 한번도 그물을 던져보지 못한 분이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의 예수께서 무슨 연유에서인가 전문 어부인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5장 5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의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해본 어부라면 누구나가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불합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1) 예수는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다. (2) 고기 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3) 그물을 내리는 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신다. (4) 시몬은 고기를 잡기 위해 지난밤을 새운 까닭에 몹시도 지쳐 있었고 게다가 깨끗하게 씻어 놓은 그물을 다시 내려 간밤의 헛수고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불합리한 점을 모두 알고 있는 시몬은 전문 어부답게 예수의 가당찮은 명령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말씀을 의지하여 그 명령에 순종한다. 시몬의 어부로서의 경험과 지식과 경력은 예수 앞에서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은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그런 경험과 지식 등이 한 끼니의 양식을 해결해 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죄와 구원의 문제는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한다. 사실 복잡한 삶의 정황들을 몸으로 부딪쳐가며 체득한 경험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노 하우(konw-how)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경험들과 스스로 설정한 원리나 기준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케 되는 경우가 있다. 성도들의 삶이란 단순한 자연법칙이나 합리적 상식의 선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역설적이고 이적적인 차원 또한 강력히 요청된다. 특히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는 끝없이 자기를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순종하는 신앙 훈련을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패,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5장 6절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다. 우리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예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것이 아니라 시몬의 심증을 보신 것이다. 결국 기적은 예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진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된다.

 

 

누가복음 5장 7절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의 지시에 따라 그물을 던져 잡은 고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이였다. 고기는 그 무게와 양에 의하여 그물이 터져 나갈 지경으로 많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시몬은 지난 밤에 함께 고기를 잡다가 헛수고만 한 다른 배의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도움을 청했다. 저자 누가는 이러한 상세한 기술을 통하여 이 이야기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부각한다. 한편 고기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 배가 잠길 지경에 이르렀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6:38, 빌 4:19). 이러한 일련의 장면은 시몬이 사람 낚는 어부로서 부름을 받은 후에 감당할 사역들을 미리 예시(豫示) 해 준다. 후에 그는 예수 부활 승천 후 말씀을 증거하고 한 번에 3,000명 또는 5,000명의 회개하는 신자들을 얻게 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한다(행 2:41, 4:4).

 

 

누가복음 5장 8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시몬 베드로

지금까지는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이 되다가 이 구절에 와서야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온다. 시몬과 베드로라는 이름이 함께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는 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누가가 의도적으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시몬이라는 이름에 덧붙여 기록한 것은 중대한 상황의 변화를 예시하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삶에 중대한 전환기(轉換器)를 맞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 하는 이름은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 예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것이다(마 16:18, 요 1:42).

 

무릎 아래 엎드려

다른 사람의 무릎 아래 엎드리거나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으로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수치로 여겨지기도 하고 비굴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여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무릎 아래 엎드리는것은 그 사람의 삶의 자존심의 마지막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종 삶의 내용이나 삶의 질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 그것은 포로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됨이나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릎 아래 엎드리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 그리고 모든 삶을 상대방 앞에서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본래 자아와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 된다. 그것은 당연한 회귀(回歸)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고 본래의 우리의 형상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내용이나 자아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본래의 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의 삶의 질그릇에 담긴 것을 쏟아 내고 하늘로부터의 것을 담아야만 한다. 대단한 역설(paradox) 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포기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주여

베드로는 5절에서 ‘선생이여’라고 부르던 호칭을 바꾸어 이제는 ‘주여’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호칭은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말이다. 70인역에서 ‘퀴리오스’(’ 주’)는 하나님과 동의어로서 빈번히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한 선생이란 표현보다 훨씬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가 이 순간에 예수를 신적 존재로 감지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로서의 권능과 권위를 수반한 예수의 탁월성을 감지했음이 분명하다.

 

죄인(하마르톨로스)

‘죄인’을 나타내는 이 용어는 누가에게 있어서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들 중 하나이다(7:37, 15:7, 19:7등). 누가에 의해서 경멸적이 아니라 동정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공공연한 죄와 용납하기 어려운 직업 및 생활 방식 또는 이교도라는 신분 때문에 유대의 종교 집단에서 추방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누가는 이런 죄인들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의 탁월하신 신적 권능을 목격하고서 상대적으로 나약하고 비천한 자신의 죄성마저 돌아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1)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이적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연의 정체를 깨달아야 마땅하며(사 6:5) (2) 그 같은 상황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누가복음 5장 9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놀라고(담보스)

놀라움을 나타내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하며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경심을 내포한 말이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궁극적으로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으로써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5장 10절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동업자(코이노노이)

이는 ‘공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7절에 나타난 ‘동무’라는 단어와는 다소 다른 뉘앙스를 준다. 특히 ‘교제’를 나타내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친교’ 뿐만 아니라 공동 협력을 통한 상호 봉사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무서워 말라

이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난 다음에 흔히 등장하는 어휘(1:13, 30, 2:10)로서 베드로가 신현현(神顯現) 장면과도 같은 상황에 압도당해 있음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 단어가 용서의 선포의 기능을 가진다고 한다. 베드로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 예수는 ‘무서워 말라’며 그의 죄인 됨을 용서하신다.

 

취하리라

이는 궁극적으로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한 말이다. 70인 역(Septuagin)에서는 이 말이 ‘위험에서 생명을 건져낸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본 구절에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한다. 특히 누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널리 퍼져 모든 인류에게 이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교회로 받아들이라는 환상을 보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데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예시(豫示)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행 10:9-48).

 

 

누가복음 5장 11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저희가 … 좇으니라

‘저희’는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말한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10절에서 이미 이야기되었듯이 하나의 일에 있어서 공동 협력을 행하는 ‘코이노노스’의 삶의 태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의 삶은 예수 공동체의 삶이다. 이들의 결단과 헌신은 예수 공동체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과 결단이 무분별한 희생이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물론 복음 사역자로서의 특별한 헌신을 뜻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용해 볼 때 모든 사회적 책임까지도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갖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가장 첫자리에 놓자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