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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주석 및 해설/42 누가복음 주석 및 해설

누가복음 4장 31절-44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31절부터 44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행하시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온갖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동네마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큐티합니다.

 

누가복음 4장 31절-44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31절-44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31절-44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31절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나사렛 동북쪽으로 약 40 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 요 6:55-59).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 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 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내려오사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여준다.

 

가르치시매(엔 디다스콘)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 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진행되었음을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 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늦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누가복음 4장 32절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권세가 있음이러라

마가복음 평행 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 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누가복음 4장 33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더러운 귀신 들린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은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 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 걸린 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 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4장 34절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아(에아)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탄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사탄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누가복음 4장 35절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 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구령을 거듭 내리신(마 8:4, 막 1:34)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가 육신 상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 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 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 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넘어뜨리고 … 상하지 아니한지라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들이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 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4장 36절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다 놀라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은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 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 추방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뿐으로 오히려 또 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 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누가복음 4장 37절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소문이 … 퍼지니라(여세포류에토 에코스)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누가복음 4장 38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시몬의 장모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 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는 베드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중한 열병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확증해준다.

 

붙들리지라(쉬네코메네)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 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네코’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누가복음 4장 39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 드니라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 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하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 드니라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 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 40절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해 질 무렵에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환자들이 예수께 몰려든 것은 안식일 때문이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노동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환자를 운반하는 일이나 치료 행위를 행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안식일에 발이 묶여 환자들은 예수께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다(창 2 :2, 3, 출 34:21).

 

손을 얹으사

원래 안수란 첫째, 제사드리는 자가 희생당할 동물에게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의 죄악을 전가시키거나(출 20:15, 19) 둘째, 신성모독자를 돌로 칠 때 신성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더러워진 인격, 죄악 등을 전가시키거나(레 24:14) 셋째, 병을 고치는 역사를 행할 때 예수님 혹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들에게 전가시키거나(막 6:5, 행 28:8) 넷째, 사도들이 사도적인 권위로써 성령이 임하지 않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행 8:18, 19) 등의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결국 안수란 공통적으로 무엇인가를 전가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중 본문에서는 세 번째의 의미로 사용된바 이러한 예는 예수뿐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께서 안수하심으로 병을 고치신 행위는 어떤 마술적인 요법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능력이 그 환자에게 전가됨을 외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 것은 예수가 치유능력의 근원이라는 것과 그가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하신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4장 41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더러운 귀신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신앙고백적 차원이 아니며 다만 예수 앞에서 그들의 패배와 예수의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이해된다. 한편 간악한 귀신들조차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서로 역설적(逆說的)인 대조를 이룬다.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사람들, 심지어 불신자들이나 귀신들까지도 예수의 정체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들이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폭넓은 증거 구실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마 4:3의 주석을 참고하라.

 

 

누가복음 4장 42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한적한 곳에 가시니

평행 구절 막 1:35에서는 예수께서 아직 동이 트기 전에 기도하셨다고 전한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은 단순히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면이지만 여기에 예수의 사역의 비결이 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눈여겨보지 않았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작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2:39-46). 예수는 언제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고 하나님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4장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

이는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이다(8:1, 9:2).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죄인들을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골 1:1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왕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오해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예수의 사역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마 12: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라.

 

전하여야 하리니

‘ … 해야 한다’(데이)는 말은 예수 사역의 필연성과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누차 사용되었다(2:49, 13:33, 24:7, 26, 44).

 

 

누가복음 4장 44절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갈릴리(테스유다이아스)

본 구절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서 각각 ‘갈릴리’나 또는 ‘유대’로 표기되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유대’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이 계속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NIV 난외(欄外)에서는 ‘유대인들의 땅’(the land of the Jews)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다. 즉 ‘땅’(land)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 전부를 의미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다. 누가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유대’(Judea)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광의(廣義)에서 ‘유대’라는 말을 쓰면 그 속에서 갈릴리가 자연스럽게 포함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예수의 이 첫 번째 전도 여행 기간은 대략 4, 5개월 정도로 추측된다. 또한 당시 갈릴리 지방에는 1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 200개 정도나 있었고 전체 인구수는 3백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