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장 14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도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치셨는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큐티하였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30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14절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성령의 권능으로 …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저자 누가는 철저하리 만큼 성령에 대해서 강조한다. 예수가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실(3:21, 22)과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1절) 등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부각(浮刻) 시킨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누가는 재차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 새로운 사역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었음을 재삼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으로 본서(10:21)와 사도행전(행 1:8, 10:38) 등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1장에서 4장까지 오면서 예수의 잉태에서 사역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개입했던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예수의 능력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몇몇 반응들(22, 28, 32, 36, 42절) 중에서 우선 예수에 대한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이유를 그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마 4:12, 막 1:14).
누가복음 4장 15절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가르치시매 … 칭송을 받으시더라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고 그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칭송했다고만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칭송을 받은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 생동력, 권위, 논리 정연함, 실제적 적용, 흥미, 진리 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31, 32절, 마 7:28, 29).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의 칭송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찾아왔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선입견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적대적 행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 장에도 기록되어 있다(28, 29절). 한편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골격을 이루며(마 4:23, 9:35, 11:1), 그 가르침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 자신에 관한 계시(마 6:32, 33, 요 14:6)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17:20, 21, 마 21:31) 등으로 요약된다. 복음서에는 병자 치유 등을 위시한 예수의 놀라운 이적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적들도 예수의 메시아되심과 메시아의 여러 교훈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누가복음 4장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께서 … 늘 하시던 대로
‘그가 자라나신 곳’은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표현이다. 예수가 회당을 방문한 것은 예수의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이다. 누가는 예수가 ‘자기 규례대로’ 곧 ‘전에 하던대로’ 회당에 참석했음을 시사함으로써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누가의 강조는 예수께서 이처럼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하고 있다.
회당에 들어가사
유대에서는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이다. 유대인들의 회당 의식은 성경에 나타난 바 없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게 되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한다. 그다음 ‘쉐마’(신 6:4-9, 11:13-21)를 고백하고 열여덟 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한다. 그 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 된 고정된 성구집(lectionary)의 구절을 읽는다. 성경은 몇 사람이 교대로 읽는데 아람어로 돌아가면서 읽는 경우도 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 하고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하게 된다(행 13:15). 한편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선정(選定)되었는데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진해서 성경을 낭독하였는지 아니면 그전에 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W.Schrage, TDNT VII, 798-841).
성경을 읽으려고
예수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시작되어 성경으로 끝난다. 이는 그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참 메시아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예수는 구약 말씀, 특히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감을 나타내신 적이 없다. 다만 예수는 율법의 자귀 자체에 얽메이지 않고 그 율법 규례들 속에 함축된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생명력 있는 교훈을 베푸신 것이다.
누가복음 4장 17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 찾으시니
저자 누가는 예수 자신이 사 61장을 선택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 구절들이 그 날 안식일에 읽히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드리거늘’(에피디도미)이란 말을 예수가 특정한 책을 요구하고 그 책을 사람들이 넘겨주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찾으시니’에 해당하는 ‘휴렌’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보다는 예수의 의도적 발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자유케 하고
예수께서 낭독하신 사 61:1, 2의 말씀은 예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아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다. 먼저 예수는 신 18:15, 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 한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곧 메시아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 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 한다(6:20, 21, 7:18-23). 본문의 ‘임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리세’은 ‘기름 붓다’, ‘기름 바르다’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신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순수한 은혜와 자비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실 것을 가리킨다(마 5:3). 그리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일차적으로 유대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환(歸還)할 것을 가리켰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아께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란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예수께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가리킨다.
누가복음 4장 19절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의 은혜의 해’는 레 25:8-55에 나타난는 ‘희년’(year of iubilee) 곧 여호와께서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한다. 나아가 이 해방의 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죄와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사(歷史)의 시기를 가리킨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는 메시아가 선도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이사야의 이 놀라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그가 당신의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편 이사야서의 인용 부분인 본문을 누가는 결국 예수의 사역에 대한 표제적(標題的)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지자이며 메시아로서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회의 소외자들, 가난한 자들 및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실 것이다.
누가복음 4장 20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책을 덮어 … 주목하여 보더라
읽기를 마치신 예수는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다.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는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 흔히 ‘섬기는 자’, ‘배 젓는 자’를 말한다. 이 ‘맡은 자’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된다. 한편 낭독자가 성경 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된다. 랍비적 전통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로 시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 나고 만다.
누가복음 4장 21절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오늘
‘오늘’을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은 다분히 긴박감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날’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아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 있는 그날로 볼 수 있으며 둘째,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오늘날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이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인 것이다.
누가복음 4장 22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를 증거하고..요셉의 이들이 아니냐
‘증거 하고’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룬’은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수가 말씀을 증거 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20:26).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즉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를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누가복음 4장 23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의사야 너를 고치라
본래 이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께서 메시아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청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 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다(11:16, 29).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는다.
누가복음 4장 24절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 아멘 레고 휘민)
이 말은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된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었다(12:37, 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A )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다(왕상 1:36)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민 5:22)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 시의 환호로서 적극적 응답을 의미하며(계 5:14) (2) 기도와 송영에서(갈 1:5, 엡 3:21, 딤전 1:17) 아멘은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처럼 예수가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 없느니라
이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는 오히려 냉대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자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 25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본 구절은 ‘ … 위에’를 나타내는 ‘에피’의 축소형 ‘에피’와 ‘진리’를 나타내는 ‘알레데이아’로 서두가 구성되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수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구약 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준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Lenski).
누가복음 4장 26절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뿐이었으며
엘리야가 …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왕상 17:8-24에 나타난 내용이다.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 온 땅에 흉년이 들어 그 상황은 매우 참담했었다. 더욱이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과부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심해 그들 중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 있는 작은 마을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그 집을 구원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엘리야가 단독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룬 일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한편 사렙다의 과부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신 경우와 유사하다(막 7:26-30).
누가복음 4장 27절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엘리사 때에 …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왕하 5:14의 내용이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장수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얻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마 8:11, 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민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 49:12, 59:19, 말 1:11, 미 4:1, 2, 슥 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 사건은 예수께서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하다(7:1-10).
누가복음 4장 28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회당에 … 화가 나서
예수의 말씀이 선민의식에 가득 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한다.
누가복음 4장 29절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된다.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다. 이는 예수를 향하여 호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사렛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수가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다.
누가복음 4장 30절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께서 … 지나서 가시니라
아직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자 누가는 단지 무리 가운데로 걸어서 지나가셨다고 전한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류에토’은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든 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를 보게 된다. 또한 선교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한다. 아울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는 가버나움으로 행로를 잡는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가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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