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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주석 및 해설/42 누가복음 주석 및 해설

누가복음 4장 1절-13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에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신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금식 후 예수님은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신 내용을 기록한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큐티를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4장 1절-13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1절-13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1절-13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4장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께서 …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준다. 예수는 ‘40 일 동안 광야’에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wander)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일간 있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신 9:9).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호 11:1)로 비유한다면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또는 단일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셨으나 여기서는 사탄이 그의 아들을 시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시험 가운데서 거의 매번 시험에 져 엄청난 죄악들을 범했지만 예수는 광야에서의 몇 차례의 시험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시험들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 똑같은 유년기, 똑같은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바로 이런 흠 없고 순전(純全)한 어린양 같은 예수께서 온갖 시험을 이기시면서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한편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구절에서도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3:22에서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시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식적(公式的)으로 모습을 드러내 메시아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침례식 이후에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 역시 이 가운데 성령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에게 있어 행동 동기였고, 그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폭발적 복음운동의 주요 동인(動因)이었다(행 2:4, 10:44, 13:4).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눅 1:15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석을 참고하라.

 

 

누가복음 4장 2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 신지라

 

마귀에게(디아볼루)

‘마귀’ 또는 ‘사탄’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비방자’, ‘고자질쟁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70인 역(LXX)은 비난자나 적이나 유혹자로서 마귀를 지칭하는데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대상 21:1, 슥 3:1). 한편 이와 유사한 내용의 단어로 ‘사타나스’(’대적자’ ‘적’)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사탄에서 유래하였다(삼상 29:4).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은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며 평행구절인 막 1:13도 ‘사타나스’를 사용하고 있다. 사탄이 세상의 왕이요 신이다(6절, 고후 4:4). 그러한 존재로서 사탄은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사탄의 통치 아래 있게 되며(마 6:13, 막 3:27, 요 6:70, 8:44, 행 13:10, 26:18, 골 1:13) 그들이 하는 일은 ‘디아볼로스’의 일이다(요일 3:8). 결국 사탄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이며 사탄의 궁극적 무기는 사망이다(히 2:14).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마귀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고 결국 사탄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 되며(10:18, 요 12:31, 계 12:9) 그 결과 사탄은 더 이상 비방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사탄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를 상대로 계속된다(고전 7:5, 엡 4:27).

 

시험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탄은 사람들을 ‘시험’(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탄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에 의해서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는다(약 1:13).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 사탄으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약 1:14, 15).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들을 하므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한 의도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12절). (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신 8:2).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포함되어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遵行) 여부’를 보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다(출 16:4). 한편 사탄의 시험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고 하신 말씀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예수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주리신지라

본 구절이 보도하는 바는 예수께서 금식을 하는 40일 동안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거나 또는 배고픔에 대해 전혀 자유했었다(Shurmann)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속 주리신 가운데 극도의 배고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가 유혹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마귀는 예수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그 배고픔을 더욱 자극하여 먹는 것으로 예수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누가복음 4장 3절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마귀가 …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여기서 사탄이 떡 덩이를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연상시킨다(출 16:31).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던 것과 같은 이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했었다(요 6:30). 결국 사탄이 예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구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아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를 보려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데 있었다. 즉, 이 사탄의 간악한 시험 배후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사이를 와해(瓦解)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예수가 수행할 메시아적 사명을 방해하려는 사악하고도 교활한 간계가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애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겨내는데, 사탄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I.H. Marshall).

 

 

누가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신 8:3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40년 동안 유랑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것이다(신 8: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준수함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신 8:3).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동안에 예수는 줄곧 신실했다. 예수께서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을 때 그들이 행동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답변한 내용은 예수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시험받을 때 모범이 되는 것이다(히 4: 14-16, 5:80. 한편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하심을 갖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는 떡 부스러기 하나를 취하시는 것조차도 인류 구속을 위해 거부하시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다(22:19, 요 6:48-51). 따라서 우리는 시험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

 

 

누가복음 4장 5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마귀가 …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두 번째 시험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시험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시험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여기서 누가는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라고 기록해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평행 구절인 마 4:8은 ‘산’이라고 기록하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신 34:1-3). 그러나 혹자(I. H. Marshall)는 ‘산’이라는 표현이 상징적(象徵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나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일이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시험을 받기 위해서 모든 세상을 구석구석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간 곳이 산이든 아니든 천하 만국을 보기 위해서 설정된 장소였다는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누가복음 4장 6절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리라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이며, 소유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탄의 주장은 거짓된 것이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로 범죄 하게 하여 그 소유권과 통치권을 넘겨받은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속임수를 통한 것이었으므로 법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아담이 행사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청지기나 대리인으로서 한 것이지 실질적 소유주로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실질적 소유주이신 하나님의 허락 없이 아담으로부터 지구의 소유권을 넘겨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의 궁극적인 소유권과 통치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탄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구의 정당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다시 당신의 것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셨다.

 

 

누가복음 4장 7절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가 요구하는 절은 단순한 인사 형식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2) 성경은 메시아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다음에야 ‘영광에 들어간다’(24:26)고 가르친다. (3) 마귀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가 왕국을 즉시에 받으므로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挫折)시키려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4장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 … 그를 섬기라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수는 사탄을 대적함에 있어 신 6:13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한 마지막 아담(고전 15:45), 곧 완전한 인간으로서 마귀를 대적했다. 즉 예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들은 마귀를 대적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려는 그리스도와(요 5:30, 6:38) 항상 그 뜻을 대적케 하려는 사탄의(창 3:1)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 4장 9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뛰어내리라

마귀는 세 번째 시험을 위해서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마태는 이 시험을 두 번째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마 4:5-7). 그렇다면 누구의 기록이 정확한 것일까?

공관복음서의 기자들 즉 마태, 마가, 누가 중에서 오직 마태만 예수의 12 사도에 속했으므로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 직접 듣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기록에 의지하여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께 그 이야기를 직접 듣고 기록했을 것이다. 또한 시험의 크기나 강도로 보아 떡 - 성전 - 천하 만국으로 이어지는 마태의 시험 순서가 정상적인 차례인 것 같다.

그럼 누가는 왜 시험의 순서를 다르게 기록하였을까? 누가에게 예루살렘과 그 안에 있는 성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대해 31번 언급했는데 이것은 마태가 13번, 마가가 10번, 요한이 12번 언급한 것에 비해서 거의 3배 언급한 것이다. 누가에게 예루살렘은 구속사에 있어서 운명의 도시(the City of the Destiny)였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수난을 통해서 구속을 완성하시는 도시요,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성전은 예수살렘의 중심이요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구속사의 핵심이요 거룩한 곳이었다. 누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하여 성전으로 끝난다. 즉 성전에서 봉사하다가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는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24:53)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과 성전을 중요시하는 누가는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예수와 사탄의 대쟁투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치고 싶었을 것이고, 그 성전에서 얻은 예수의 승리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싶어서 그 이야기를 마지막에 배치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의 자기 과시욕을 부추겨 그러한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꼭대기’라는 말의 헬라어 ‘프테뤼기온’은 ‘날개’라는 뜻의 ‘프테류스’에서 온 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세푸스(Jos, Antiq. 15, P. 411)에 의하면 이는 성전 바깥뜰 남쪽에 있는 주광을 뜻한다고 한다. (2)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성전문 위를 가로지르는 인방(lintel)이라고 한다. (3) 게르하드슨(B. Gerhardson, Testing Gods son, P. 54)에 따르면 시 91:4(LXX은 제90편)의 ‘프테뤼가스’(날개들)와 본문 9절의 ‘프테뤼기온’(꼭대기) 사이에는 일종의 언어유희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종의 성전을 보호해 주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해도 본 구절을 이해하든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끌고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랍비 문헌에 보면 메시아가 성전의 꼭대기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비록 랍비 문헌에는 뛰어내린다는 언급은 없지만 마귀는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험을 예수께 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누가복음 4장 10절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하나님이 …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한다(시 91:11, 12).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귀는 시 91:11, 12을 인용하면서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게다가 여기에 인용된 시편은 택한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엄히 징계하신다고 가르쳤지만(신 6:16, 18:20, 사 45:9) 마귀는 이런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한 신앙을 변색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킨다(마 22:29, 고후 2:17). 사실 세계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허다한 이단들은 성경을 그들의 경전으로 내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세우고 은폐시키려는 목적에서 아전 인수(我田 引水) 격으로 짜 맞춘다는데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 11절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장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예수의 대답은 다시 성경의 인용으로 주어진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에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출 17:1-7)를 배경으로 하는 신 6:16을 인용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마귀의 시험에 응한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격분(激忿)케 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사탄의 시험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는 본 절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누가복음 4장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가 … 떠나니라

사탄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전까지는 사탄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탄이 예수의 전 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탄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사탄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탄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 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 있어서의 사탄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 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 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 막 1:13). 이것은 각 제자 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