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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주석 및 해설/42 누가복음 주석 및 해설

누가복음 2장 41절-52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2장 41절부터 52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12살이 되던 해에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선생들과 논쟁을 하시던 장면과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41절-52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2장 41절-52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2장 41절-52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2장 41절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그 부모가 해마다 …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경건한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의식은 온갖 위선과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구약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율법 의식들은 여전히 중요한 구속력(拘束力)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경건한 자들이 그러한 의식에 맞춰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이었다. 율법에는 유대 성인 남자들이 연례행사로서 삼대 주요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지키도록 명시되어 있다(신 16:16). 그러나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어 이행사에 매년 모두 참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에만은 꼭 참석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켜졌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어린 예수가 자란 가정의 신앙적 배경을 살필 수가 있다. 어린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적 및 인격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의롭고 경건한 삶에 훈련되어 갔던 것이다.

 

 

누가복음 2장 42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열두 살

유대인에게 있어서 12살은 중요한 나이였다. 12살이 되면 유대인 남자들은 ‘바르 미츠바’ 즉 ‘율법의 아들’이라고 불렸다. 이때부터는 거룩한 절기나 예식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누가복음 2장 43절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그날들을 마치고

유월절과 무교절은 모두 7일 동안 계속되었다(출 12:15, 레 23:6-8, 신 16:3). 그리고 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은 적어도 이틀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 예수는 … 알지 못하고

예수는 그의 부모들보다 예루살렘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당시 열두 살의 나이는 결코 어리게만 간주되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부모는 예수의 움직임을 일일이 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어중간한 나이였던 예수는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의 행렬이나 남자 어른들과 제법 나이가 든 소년들의 행렬 중 어느 한 곳에 끼여 여행했을 것이다. 이 행렬이 이처럼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면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여행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여행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하여 알아야 할 것은 예수의 평소의 행동이 매우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에 부모들이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하루가 끝나갈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의 부모들이 찾고 있을 시간에 성전에서 최고의 학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그를 게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찾아 헤맨 것이다. 만일 그의 부모들이 예수의 메시아성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그의 신성을 깨닫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바로 성전에 가서 찾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아버지의 집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장 44절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동행 중에 …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성전 절기 준수를 위해 성전으로 모이는 여행자 무리는 같은 마을 이웃들과 친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매일 저녁 때 이 무리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함께 모여 유숙하고 여행 일정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일행 중에 있을 줄로 알고 신경 쓰고 있지 않았으나 저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려할 때 그가 없음을 알고 아는 사람들 속에서 그를 찾아 나섰다.

“한편 요셉과 마리아는 큰 혼란과 걱정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예수를 잃어버리고 그가 뒤에 남아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당시 나라의 인구는 매우 조밀하였으며 갈릴리에서 온 무리의 대열은 매우 컸었다. 그들이 도시를 떠날 때에 큰 혼잡이 있었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친구나 친지와 함께 여행하는 기쁨에 관심이 몰두되어 밤이 되기까지 예수가 없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쉬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에 도움이 되는 아이의 손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 아이가 무리 가운데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비록 어렸지만 그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였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필요를 미리 알고 언제든지 와서 그들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염려가 되었다. 그들은 온 무리를 다 살펴보았으나 헛일이었다.”

 


누가복음 2장 45절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찾으면서

헬라어 ‘아나제툰테스’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마리아 부처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줄곧 예수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음을 뜻한다.

 

 

누가복음 2장 46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여행하고 나서 예수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44절). 이튿날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를 찾는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45절).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사흘 후에’ 그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만났다.

 

선생들 중에 앉으사 … 묻기도 하시니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남동부 등 이렇게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Talmud)는 전한다. 대체로 랍비들은 바로 이 안뜰의 남동부에 있는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講論)했다고 한다. 당시 생존해있던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말리엘’(Gamaliel),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으로 짐작된다. 추측해 보건대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중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예수와의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외경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에서는 이때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며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 등도 논의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없다. 아무튼 어린 예수께서 당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누가복음 2장 47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듣는 자가 다 … 기이히 여기더라

‘기이히 여기더라’(여시스탄토)는 미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놀라움을 나타내며, 그 원형 ‘에크시스테미’는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이다. 즉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계속하여 반복해서 그 질문과 답변에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놀라움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토록 영특한 이야기가 넘쳐 나온 사실로 말미암은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 자체의 탁월성에 기인한 것임에 분명하다. ‘지혜’에 해당하는 ‘쉬네세이’은 ‘이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이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예수의 답변과 하나님의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누가복음 2장 48절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 너를 찾았노라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들의 처음 가졌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불과 12세에 불과한 소년이 당대의 석학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그들에게도 놀라움으로 먼저 다가왔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신비스러운 일들이나 차츰 성장하면서 보여준 특출한 지혜와 인격에 대해 남다른 경험을 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경험한 바 계시에대한 이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적 의의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책망 조로 탓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걱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속상한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49절) 마리아 부처로 하여금 예수의 신분에 대해 다시 깊이 숙고해 보게 하였을 것이다.

 

 

누가복음 2장 4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어찌하여 … 알지 못하셨나이까

본서에 나오는 예수의 첫 말씀이다. 이는 혈육상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하신 삼가는 투의 공손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분명히 천명(闡明)하신 단호한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사항을 상고해 볼 수 있다. (1) 혈육 상의 모친에 대한 순종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 사이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한 가정의 아들로 탄생하셨기 때문에 그 부모에 대한 임무에 충실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사로운 일에 얽매 일 여념이 없을 엄청난 사명, 곧 온 인류에게 구원의 산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인간에 대한 모든 임무는 하나님의 계명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수행될 수 있을 뿐이며 우선순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18:29, 신 33:9, 마 6:33). (2) 예수는 자신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개되어감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특히 ‘있어야 될 줄을’이란 표현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위성(I must be … )을 강조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의 우선순위 문제, 그리고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간의 양자택일 문제를 놓고 믿음의 용단(勇斷)을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

 

내 아버지 집에

예수께서 하나님을 독특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부른 최초의 언급이며(22:29, 23:46, 마 11:25, 막 14:36, 요 5:17),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한 것이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내 아버지의 일’(My Father’s business)로도 번역된다. New KJV는 본 절 하반절을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라고 옮겼다. 이는 ‘집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이스’가 중성 복수로 ‘일’ 또는 ‘사물’의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이라 번역하든 ‘집’이라 번역하든 이 구절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일을 실천해 나가면서 살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그가 머물 자리이고 그의 집이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2장 50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그 부모가 … 깨닫지 못하더라

마리아에 임한 예수 탄생에 관한 계시를 생각해 보면이 구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부의 깨닫지 못함이 훨씬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48절에서도 나타내었듯이, 설령 그들이 예수께 얽힌 여러 신비로운 계시를 접했다고 해도 그 의미를 확연히 깨달을만한 영적 수준에는 도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장 51절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께서 …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누가는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 언급하고나서 한 가정의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수는 이후 침례 요한으로부터 침례 받으실 때까지(3:21) 18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 동생들을 보살피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다(막 6:3). 요셉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이 18년 어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요셉이 죽자, 장남인 예수가 그의 가족을 부양(扶養)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모친은 … 마음에 두니라

1장의 주석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누가는 이 복음서의 내용 중 일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얻은 듯하다. 그녀는 여기 언급된 세부 내용들을 말할 수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말’이란 본 장의 사건 전반에 걸쳐 나타난 말들을 지칭한다.

 

 

누가복음 2장 52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는 …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외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셨다고 전하지만 그 증거는 불확실하다. 본문이 거듭 밝히는 바는(40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 갔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신성(deity)을 도외시하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빌 2:6, 7). 한편 ‘키’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은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된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만 ‘키’로 보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왜냐하면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 의미를 신체적인 성장이나 인격적인 성장으로 보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착실한 성장은 모든 이의 귀감(龜鑑)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그의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이런 칭송은 후에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받았던 칭송으로 이어졌다(행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