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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주석 및 해설/42 누가복음 주석 및 해설

누가복음 2장 22절-40절, 주석과 해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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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22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정결예식과 그로 인하여 시므온과 안나가 예언과 찬송을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22절-40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2장 22절-40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2장 22절-40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2장 22절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정결예식의 날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하게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율법이 정한대로 정결케 되는 기간(남자 아이 40일, 여자 아이 80일, 레12:1-5)이 찬 산모는 최종 정결 예식으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다.

여기서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렸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할 경우 번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대치할 수 있었다(레 12:1-8). 본문에서 누가는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행위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아기 예수를 위해 제사장을 찾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결국 이 예수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다(히 3:1).

그러므로 아기 예수는 40일 이상 베들레헴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리고 결례 후에는 더 이상 불편한 베들레헴에 머무를 필요가 없으므로 떠나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에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를 보러간 것을 보아 결례예식 후에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간 것은 결례예식 후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예수 가족은 애굽으로 피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동안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머물러 있었는지, 다른 집에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 마구간이 짐승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 아니고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치워진 곳이었다면 그곳에 그대로 40일이 넘게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다.

 

 

누가복음 2장 23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주의 율법에 … 아기를 주께 드리고

율법은 처음 난 짐승의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도록 규정하였다(출 13장, 22:29, 34:19, 민 3:11-13, 40-51, 8:16-18, 신 15:1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아기를 제물로 드리는 일을 대치시키기 위해 레위 지파를 성별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슷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께서도 장자, 곧 거룩한 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긴 하지만 전혀 무죄하시다(히 4:15). 따라서 예수가 주께 바쳐진 것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한다(딤전 2:5). 실로 예수의 생애 자체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연속이었다.

 

 

누가복음 2장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누가는 계속해서 산모의 정결예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반구는 산비둘기를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가정환경과 그 사회적 형편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앞서 기술했듯이 레 12장에는 해산한 여인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을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마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에 따라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 그 양(量)과 방법들이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극빈자의 경우는 정한 제물의 양대로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갈등을 갖게 될 것이므로 그 양을 줄이는 것 역시 법으로 정하여 바치게 했다.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들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레 12:8).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부유한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가 하나님을 경배하여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 당시 비둘기의 가격은 어린 양의 약1/10정도에 해당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극빈층에 속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누가복음 2장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

이러한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구절의 시므온은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의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막연한 추측일 뿐 정확한 자료나 확증이 없다. 어쨌든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왔으며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메시아가 바로 그의 위로의 근원인 것이다. 이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며, 우리가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경건된 삶을 준비하여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마 25:1-13).

 

의롭고 경건하여

1:5, 6에서 세례 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스벱이 소개될 때처럼 의로음과 경건함이 강조되고 있다. ‘의롭고’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스’은 ‘공정한’, ‘정의로운’등의 뜻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신정 사회(神政社會)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의로운’ 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율라베스’은 ‘경건한’, ‘독실한’ 등의 의미외에 ‘주의’, ‘신중함’ 혹은 ‘두려워하다’, ‘경계하다’ 등을 뜻하며, 율법의 요구를 면밀하고 세심하게 충족시키고자 행동거지를 주의하는 독실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잘 사용된다. 따라서 시므온이 얼마나 율법을 공경하며 준수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위로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받는 위로를 가리킨다(사 40-55장). 말라기선지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시므온은 이러한 소위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메시아의 도래를 확신하며 끈기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우리는 눈앞에 전개되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갈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까지 투시(透視)하는 신령한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2장 26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지시를 받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레마티스메논’은 ‘사건을 다루다’, ‘계시를 전달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본 구절에서 이 단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메시아를 대망하며 그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시므온은 오랜 세월을 메시아의 도래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시의 전달자인 성령을 통해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보리라는 계시를 허락하셨다.

 

 

누가복음 2장 27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성령의 감동으로(엔 토 프뉴마티)

이 구절은 시므온이 계속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시므온이 성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 부처가 아기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시므온을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정확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이먹은 시므온은 이제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부모

법적인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부모였다.

 

 

누가복음 2장 28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찬송하여

아기 예수가 나타났을 때 시므온은 그를 알아보고 안아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시므온은 율법에 따라 결례와 번제와 속전을 드리러오는 많은 사람, 많은 아이 가운데(그 중에는 품위있고 고상해 보이는 부모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골 출신의 요셉과 마리아가 데리고 있는 예수를 보자 곧 그가 메시아임을 알게되었다. 이는 오직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에 분명하다. ‘찬송하여’에 해당하는 ‘율로게센’은 ‘좋게 이야기 하다’, ‘축복하다’(bless, KJV) 등의 뜻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2장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누가복음 2장 30절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시므온은 히브리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아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의 한 특징으로서 이미 나타난 바와 같이(1:69,71,77)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구원이 구체화된 것(embodied)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현될 인간구원의 역사를 예견하였다는 의미이다. 사실 예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역의 첫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 사역은 벌써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시므온은 구약시대 동안 계속해서 예언되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던 메시아를 맞이하는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인물이요, 또 메시아를 맞이함으로 신약시대를 열도록 길을 열어주는 서언적(序言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갓난아기의 모습인 예수를 보고서 그토록 즐겁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시므온이 받았다면, 구원의 실제적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더 큰 기쁨과 확신을 나타내어야 하겠는가!

 

 

누가복음 2장 31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만민 앞에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서 세상 끝에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이는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의 지경을 넘어 세게 만방에로 확장될 것임을 내다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이다. 한편 이방인의 구원 혹은 복음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는 누가복음에서 강조된 사실들 중 하나이며(15장),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었다(사 43:5,6, 45:6, 49:12, 미 4:1,2, 슥 8:20-23). 이점에 관해서는 마8:1-17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관계’를 보라.

 

 

누가복음 2장 32절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빛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또한 그의 온전히 의로우신 성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시 27:1, 요 1:5, 딤전 6:16) 또 하나님의 계시와(시 34:5) 생명의(요 1:4) 상징으로서 언급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사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이방에 전파할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고 되어있다(사 42:6). 이러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예수는 그 가운데 조금의 어둠도 없으신 참빛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障壁)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비추이신다(요 1:9). 그리고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고(마 5:14)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명하셨다(마 5:16).

 

주의 백성 … 영광이니이다

예수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왜냐하면 온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의 길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세력의 지배 하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잃은 상태였는데, 이제 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특권을 바로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메시아를 배척하고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로 내몰아 버렸다.

 

 

누가복음 2장 33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기이히 여기더라

마리아와 요셉이 기이히 여기며 놀란 것은 단지 시므온의 찬송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보다는 천사들, 목자들, 동방박사들, 엘리사벳, 사가랴 그리고 시므온 등 사방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아기 예수에 관한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을 접하게 됨으로써 마리아 부처는 애초 그들에게 임했던 천사들의 계시를 거듭 상고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들의 이해를 보다 깊게 다져 나갔을 것이다.

 

 

누가복음 2장 34절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많은 사람의 … 세움을 입었고

이 구절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도 하는 반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기초석이 되기도 하는 돌(사 8:14, 28:16)에 관한 사상을 반영한다. 예수를 배반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며 멸망에 이르게하실 것이요 또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세움을 입고 하나님 나라의 초석(礎石)이 되게 하실 것이다. 또한 예수는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박해와 곤욕을 치러야만 될 것으로 예언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받으셨던 각종 모욕과 비방(4:29, 22:63-65, 23:11, 34-39)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시 32:6-8, 사 50:6, 53:4-12)임을 증거해 준다. 시므온의 이러한 예언은 엘리사벳의 노래나(:42-45) 사가랴의 예언(1:68-79) 그리고 천사들의 찬송과는(2:10-14) 반대로 예수께 드리워질 어두운 면을 증거한다. 예수의 영광에 관한 기쁨의 증거와 더불어 이러한 비탄스러운 증거는 앞으로 전개될 메시아적 사역의 진면목이 어떠한지를 암시해 준다.

 

 

누가복음 2장 35절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칼’을 나타내는 헬라어 ‘롬파이아은 드라키아인들의 대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큰 칼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리아는 ‘여인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1:42) 곧 메시아의 어머니라는 영광과는 또 달리 ‘슬픔의 어머니’(Mater dolorosa)로 묘사되고 있다. 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나사렛에서 함께 보낸 소년 시절과 청년시절이 가장 행복된 나날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됨과 그의 때를 같이하여 대두한 유대교 지도가들의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각성을 띠어 갔으며, 이로 인해 혈육의 정을 떨칠 수 없었던 마리아로서는 예수의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받을 때 큰 칼이 찌르는 것보다 더한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드러내려 함이니

여기서 헬라어 ‘아포칼뤼프도신’은 ‘베일이 벗겨지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과 허위가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숨기워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통해 사실 그대로 드러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그를 섬기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누가복음 2장 36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

시므온의 소개와는 달리 안나의 경우는 지파명까기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시므온의 경우는 구체적인 신분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나 안나는 삶의 배경이 기술되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이었다(창 30:13). 예수 탄생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어 나머지 10지파의 행방은 불투명했다. 이는 바벨론 포로지로부터 귀환(歸還)한 자들 중 거의가 이 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연유도 있겠는데, 안나도 바로 다른 지파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그 잃어버린 지파 백성의 후손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한편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 이라는(창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이다. 따라서 히브리식으로는 ‘브니엘’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의 ‘한나’에 해당한다(삼상 1:2). 즉 이 이름은 사사이며 제사장이고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녀는 구약 성경의 드보라(삿 4:4)와 훌다(왕하 22:14)와 같이 휼릉한 여성 예언자였다.

 

 

누가복음 2장 37절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과부 된 지 팔십 사 년이라 …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당시 유대 사회의 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하여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나의 나이는 14+7+84=105세 쯤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여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이스라엘의 소망 곧 메시아를 대망하며 기도했던 여인임을 나타내준다. 아마 그녀는 오직 메시아만이 그녀와 이스라엘의 가슴에 수십년 동안 맺혀있던 응어리를 풀어주고 위로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편, 안나는 성전에서 시므온의 송가(頌歌)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송가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그 아기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확신하였다.

 

 

누가복음 2장 38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도몰로게이토’’는 ‘찬양하다’, ‘감사하다’ 등의 뜻외에 ‘단호하게 신앙을 고백하다’,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안나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 고백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나의 감사는 순종 및 메시지의 선포와 결합되고 있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구절은 사가랴가 이스라엘의 속량(1:68)을 노래하고,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25절)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사 52:9에 나타난 메시아의 예루살렘 구원에 대한 대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사실 ‘구속’은 예수께서 이룩하실 신적구원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롬 3:24, 엡 1:7, 골 1:14).

 

 

누가복음 2장 39절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주의 율법을 따라

누가는 예수의 부모들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준수하였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본 장 내에서만 하더라도 예수의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었는가 여러차례 강조되고 있다. 22절(모세의 법대로), 23절(주의 율법에 쓴 바), 24절(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27절(율법의 전례대로 미루어 보건대 마리아 부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유대인의 전형(典型)이었다. 본 절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롬 10:4)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갈4:4) 친히 율법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갈릴리로 … 나사렛에 이르니라

누가는 마태복음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방 박사의 방문이나 애굽으로의 피난 기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누가가 마태의 기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실례를 들기 위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넣었겠지만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누가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정상적인 어린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40, 52).

 

 

누가복음 2장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아기가 자라며 … 그 위에 있더라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된다. 그리고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42절) 이전의 이야기이다.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세례 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