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3장 15절부터 38절까지의 말씀은, 세례 요한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의 말씀과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는 다른 순서로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통하여 큐티하였습니다.
누가복음 3장 15절-38절, 주석과 해설 정리
누가복음 3장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요한을 … 의논하니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메시아가 곧 도래하리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 가운데에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선포되자 그들의 메시아 대망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고조되는 메시아 대망의 분위기 속에서 세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에는 그만큼 능력과 확신이 있었으며 그의 세례는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유다 지파 출신도 아니었으며 또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사 11:1, 29:18,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어 백성들을 반신 반의(半信半疑)하게 만들었다. 요 1:19-25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3장 16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나는 물로 … 세례를 베풀거니와
요 1:20 에서는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님을 스스로 강하게 부인하는 내용이 나오는 반면, 여기서는 자신의 사역과 메시아의 사역을 비교함으로써 메시아의 탁월성을 밝히 드러내 보인다. 고대 세계에서 물은 흔히 정결케 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물은 정화(淨化) 의식, 예를 들면 제의적으로 정결함을 인정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이 의식에서는 가능한한 흐르는 물이 사용되었다. 한편 정화 의식 외에도 물은 때로는 특별한 형태의 의식의 집행 과정에서 신성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적인 예식이 죄를 씻어 버리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기 전까지의 예비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3:1-20).
신발끈을 풀기도
근동과 그리스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맨발로 다니거나 샌달을 신고 다녔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예배나 애곡, 금식 등을 할 때는 보통 샌들을 벗었다. 이때 노예들은 주인들의 샌들을 묶거나 풀어주며 또 필요하지 않을 때는 샌들을 집으로 가져갔다. 이렇듯 주인이나 주인의 방문객들의 신발을 풀고 묶어주며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은 가장 낮은 노예의 의무였다. 요한처럼 이렇게 능력 있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발에 신기운 하찮은 신발끈조차 풀어드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면 도대체 예수는 얼마나 위대한 분이란 말인가?.
성령과 불로
성령 세례와 불 세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문을 보면 헬라어 전치사 ‘엔’(’ … 안에’ 혹은 ‘ … 로써’)이 ‘성령’과 ‘불’을 동시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세례 요한의 이 예언이 바로 욜 2:28의 성취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1:5)을 뜻함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마 3:11의 주석을 참고하라.
누가복음 3장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손에 키를 들고 … 불에 태우시리라
성령과 불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요한은 농사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든다. 농부들은 키를 가지고 곡식의 열매를 키질한다. 그러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구별된다. 무거운 것(알곡)은 키에 남게 되어 타작마당에 쌓이게 되고 가벼운 것(쭉정이)은 모아져 불살라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와 불신자를 이렇게 구분하실 것이다. 즉 그가 재림하실 때 타작마당을 정(淨)하게 하듯이 심판의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말은 영원한 심판과 멸망을 가리킨다(욥 20:26, 사 34:9, 10, 66:24, 마 5:22, 13:42, 50, 막 9:43-48). 그리고 이러한 추수와 타작이 심판과 관련되어 묘사된 예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바이다(시 1:4, 잠 26장, 사 41:15, 렘 15:7, 계 14:14-20). 요한의 이 경고는 매우 엄중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심판이란 자신들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이방인들에게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왜곡된 특권 의식을 지적하고는 회개를 통하여 타작마당의 심판에 대비하도록 경고한다. 이와 같은 요한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날에 성취될 것이다. 그래서 그때 예수께서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시고 악인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질 것이다(벧후 3:7).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한 설명은 마 3:12의 주석을 참고하라.
누가복음 3장 18절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요한의 메시지는 신랄한 경고와 책망이었음과 아울러 ‘좋은 소식’이었다. 타작 마당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제토’은 사복음서에서 줄곧 ‘복음을 전파하다’는 내용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통한 절대적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자신의 사역을 마감하게 된다.
누가복음 3장 19절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분봉왕 헤롯은 … 책망을 받고
여기 헤롯은 1절에서 등장한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이다. 요한은 백성에게는 ‘권하여’ 말씀을 전하였지만 헤롯에게는 ‘책망’을 했다. 요한의 책망은 헤롯의 무분별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헤롯은 A.D. 26년경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Aretas)의 딸을 버리고 그의 조카이자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것은 유대적 전통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패륜(悖倫)이었다(레 18:16, 20:21). 또한 헤롯의 난잡한 생활과 악행은 유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요한의 헤롯에 대한 공공연한 책망은 많은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백성들의 불만과 요한의 직선적인 공격은 헤롯의 권력 구조에 위기감을 조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에 대한 반감 분위기의 진원지(震源地)라고 생각한 세례 요한을 체포하게 된다. 이로써 헤롯의 악행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누가복음 3장 20절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한 가지 악을 더하여 … 옥에 가두니라
‘더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티데미’은 ‘더하다’, ‘첨가하다’등의 뜻 외에도 ‘같은 종류의 또 다른 행동을 하다’, ‘계속해서 하다’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죄악을 뉘우칠 줄 모르고 더욱 큰 죄악으로 빠져들어갔던 헤롯의 타락된 심성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세례 요한의 활동이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되는 한 자신의 행동에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를 것이고 나아가 자신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헤롯은 악한 권력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탄압으로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에는 헤로디아의 농간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헤롯 정권의 윤리적, 도덕적 상황은 참담할 지경에 이른다. 누가는 본서에서 요한을 체포한 죄를 헤롯이 저지른 악행 중에서 가장 악한 죄였다고 기록하였다. 그것은 헤롯이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에게 손을 대어 그의 복음 전파를 침묵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불의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말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한편 요한의 죽음에 관해서는 9:7-9과 막 6:17-29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3장 21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는 12살때 예루살렘에 와서 랍비들과 변론한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성장 기간을 보내셨으며(2:52) 그 후 착실히 성장하여 마침내 공생에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세례 요한이 물러가고 예수께서 나타나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인은 아니다(히 4:15). 따라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회개할 것이 있는 죄인이어서가 아니다. 다만 예수는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 3:15에서 예수는 자신이 세례를 받으므로 ‘모든 의(義)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며 세례를 받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한편 마샬(marshall)은 ‘백성들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활동이 절정에 달한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세례가 요한의 사역의 정점에 위치하였다는 뜻이다.
기도하실 … 열리며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기도를 했다고 언급한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첫 번째 기도 모습이다(6:12, 9:18, 29, 22:41). 예수는 일생 동안 기도의 삶을 사셨다. 그의 혼신을 다하는 기도는 하늘을 열리게 한다. 마가의 경우는 누가보다 하늘이 열렸다는 사건을 훨씬 더 생생하게 기술한다(막 1:10).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곧 계시나 말씀을 주시려고 한다는 상황적 암시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의 기간을 깨시고 다시 그의 능력과 권위를 행사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이는 예수께서 본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며(요 3:13)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암시한다.
누가복음 3장 22절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령이 … 비둘기 같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현현(顯現) 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출 24:10, 11, 33:11, 신 5:4). 그러나 이곳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고 전한다. 누가는 성령이 임할 때 오직 예수만이 그것을 의식했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였다는 식의 별다른 보도를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아마도 그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성령 강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비둘기 같은 형체가 내려오는 것만을 보았을 것이다. 한편 ‘비둘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온유하고 평화스러운 속성을 나타낸다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한편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모습과 그 의미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신자의 삶에서 죄를 소멸시키며 성결케 하는 능력(사 6:1-7, 행 2:3)의 불로 표현된다.
- 깊이 감추어져 있으나 강력하며 중생케하는 힘(요 3:8)의 바람으로 표현된다.
- 온유하고 부드러우며 평화스런 속성(막 1:10)의 비둘기로 표현된다.
- 영적인 삶을 충만하게 넘치도록 채우시는 힘(요 7:37-39)의 물로 표현된다.
- 신자를 당신의 것으로 소유하셔서 완전하게 영원한 교호(交互)를 약속하심(엡 1:13)의 인침으로 표현된다.
- 사역을 위해 부여되는 능력(행 10:38)의 기름으로 표현된다.
한편 이러한 성령 임재는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 하신 약속(사 42:1)과 성령이 그 새로이 생겨난 가지에 임할 것이란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이기도 하다(사 11:2). 또한 예수가 하늘나라의 일을 위하여 위임을 받고 그 일을 시작하기 이전의 준비 절차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너는 … 기뻐하노라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직접적으로 공표하신 말씀이다. ‘사랑하는’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가페토스’은 ‘사랑하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아듸’이나 ‘딸’을 붙여 사용할 때는 ‘외아들’, ‘외동딸’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아가페토스’는 예수가 유일한 아들, 즉 독생자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한편 이 구절은 변화산에서 들려진 음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을 포함하고 있다(사 42:1).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 천사들(욥 1:6, 2:1)과 이스라엘 국가와 이스라엘의 왕들(출 4:22, 삼하 7:14, 호 11:1)에 적용시켰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 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될 것이라는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에서도(1:32)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사랑하는 … 기뻐하노라’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의 유일무이하고도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요컨대, 예수께서 받으신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 사역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향한 공생애를 시작하고, 성령도 성자가 그 일을 감당하도록 협동하여 힘을 공급해 주시며, 성부도 그 일을 시작한 아들에게 하늘을 열고 땅을 향해 기쁨과 승인의 음성을 발하였던 것이다.
누가복음 3장 23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예수께서 … 삼십 세쯤 되시니라
예수의 나이가 기록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이다. 누가가 공생애 시작 당시 예수의 나이를 ‘30세 쯤’으로 밝힌 것은, 30세라 하는 나이가 제사장들이 그들의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하는 시기(민 4:3)인 점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해 마침내 예수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실 시점에 이르신 것이다(히 5:10). 즉, 예수는 스스로는 전적으로 무죄(無罪) 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죄악의 장벽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여실(히 10:20) 시점에 이른 것이다. 한편 그리고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고(창 41:46) 다윗도 30세에 왕위에 올랐다(삼하 5:4). 또한 산헤드린의 회원 자격도 30세가 되어야만 주어졌다. 따라서 누가는 이러한 여러 배경을 감안하여 예수의 나이를 밝혔을 것이다.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연륜을 감안해볼 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신앙적으로도 사역을 하기에 충분한 시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항상 자신의 ‘때’를 잘 알았다(요 7:6).
헬리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요셉을 낳은 사람은 야곱이라고 나오는데(마 1:16), 본 절에서는 요셉의 위(이상)가 헬리라고 한다. 이런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여러 의견들 중에는 (1) 두 개 이상의 이름을 가진 동일 인물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기록하였다는 견해와, (2) 요셉의 어머니는 남편이 둘이었는데, 첫째 남편 헬리가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가까운 친척인 야곱이 헬리의 이름으로 기업을 이어받아 낳은 아들이 요셉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
이 문제에 대해 만족스런 해답을 찾기는 힘들어 보이지만, 그나마 가능한 추측은 누가는 어머니 마리아 쪽의 족보를 기록했고, 마태는 아버지 요셉 쪽의 족보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요셉과는 직접적인 혈통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어머니 마리아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갔다는 것이다. 헬리를 마리아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요셉의 이상(위)이라고 한 것은 마리아가 헬리의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사위인 요셉이 아들처럼 여겨졌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3장 24절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맛닷
이는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또 나타나고 ‘맛다다’(31절)와 ‘맛다디아’(25, 26절)라는 이름과 비슷하다.
레위
이 이름의 어원은 불확실 하나 히브리어 ‘레위’의 뜻을 따라 일반적으로 ‘점착(粘着)하다’, ‘연합하다’등의 뜻을 담고 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멜기
이 이름은 아마도 ‘말기야’(, 말키야, ‘나의 왕은 야훼이시다’)의 축소형인 것 같다(G.Kuhn). 이 이름은 28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안나
이 이름의 뜻은 ‘조롱하다’이다. 이 이름은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누가복음 3장 25절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맛다디아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26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아모스
이 이름의 인물은 성경 상에서 이사야의 아버지로(왕하 19:2) 혹은 선지자(암 1:1)로서 나타난다. 이 이름은 ‘짐 지는 자’ 또는 ‘강함’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나훔
예수의 조상으로서 그리고 선지자로서 성경에서 언급된다. ‘위로하고 돕는 자’라는 뜻이다.
에슬리
이 이름은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나를 가까이 함’이라는 뜻이다.
낙개
대상 3:7에 나오는 ‘노가’과 비슷하다. ‘빛나다’라는 의미이다.
누가복음 3장 26절
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마앗
‘끊는 것’을 뜻한다. 대하 29:12, 31:13에서 나오는 마핫과 비교된다.
서머인
히브리어로 ‘시므이’(출 6:17등)가 된다. ‘몰약성’이라는 뜻이다.
요섹
바벨론 포로 이후의 인물인 듯한데 이곳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요다
바벨론 포로기 때의 인물이다.
누가복음 3장 27절
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요아난
히브리어 ‘요하난’의 헬라어 음역이다. 요하난이란 이름은 (1) 유다 왕 요시야의 장남(대상 3:15) (2) 다윗의 여덟 번째 용사(대상 12:8-12) (3) 느헤미야 당시 도비야의 아들(느 6:14)등에게도 붙여진 바 있다.
레사
‘황태자’라는 뜻의 아람어로서 원래 스룹바벨의 칭호로 소개된 말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스룹바벨이 유대의 지도자로 바벨론에서 포로들을 인솔해 유대 땅으로 귀환하자 백성들은 그를 유대 왕의 계승자로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황태자’라는 칭호가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스룹바벨’과 ‘스알디엘’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도 나타난다(마 1:12).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뒷받침된다(스 3:2, 학 1:1). 그러나 대상 3:19에는 스룹바벨이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는 앞서 설명되었듯이 수혼(嫂婚) 관계에서 해결될 수 있다. 대상 3:17, 18를 보면 스알디엘과 브다야는 여고냐의 아들로서 서로가 형제지간이었다. 따라서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의 법적 아버지이며 브다야는 그의 원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여고냐라고 대상 3:17에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본문은 그의 아버지를 내리라 기록하고 있다. 이것 역시 수혼 제도로써 설명될 수 있다. 즉 여고냐가 아들이 없이 죽자(렘 22:30) 네리의 친아들이 여고냐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Machen, Plummer).
누가복음 3장 28절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멜기
스룹바벨의 증조부로서 ‘왕’이란 뜻이다.
앗디
스룹바벨의 5대 조이며 그 이름은 ‘붙들다’라는 뜻이다.
고삼
‘나누다’라는 의미이다.
엘마담
창 10:26의 ‘알모닷’이라는 이름과 비교된다. 바벨론 포로 이전의 사람이며 그 이름은 ‘광대’라는 의미이다.
에르
이 이름의 인물은 구약성경에 두 명 등장한다. 한 명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난 유다의 장자이며(민 26:19) 다른 하나는 겔라의 자손이다(대상 4:21).
누가복음 3장 29절
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예수(Jesus)
구약의 ‘여호수아’(수 1:1)와 같은 이름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으로 ‘여호와의 구원’ 혹은 ‘구세주’라는 뜻이다(마 1:21).
엘리에서
이 이름은 ‘엘리에셀’을 달리 번역한 것이다. 이는 창 15:2, 출 18:4에 나타난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이다.
요림
‘여호와의 칭찬’을 뜻한다.
누가복음 3장 30절
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유다
역시 이스라엘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이다. 본문의 인물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사람이다.
요남
다윗 이래 약 200년 후의 인물로 추정된다.
엘리아김
왕하 18:18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이름이다. 이 사람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누가복음 3장 31절
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멜레아
이 이름은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이름의 주인공은 다윗의 고손(高孫)이며 이름의 뜻은 ‘충만’이다.
멘나
이 이름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이는 다윗의 증손이며, 이름의 뜻은 ‘큰 고통’이다.
나단
마태의 족보에는 다윗 왕의 아들로 솔로몬이 나오는데(마 1:7), 본 절에는 나단이 나온다. 나단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 중 세 번째 아들이다(삼하 5:14, 대상 3:5, 14:4). 이 이름은 ‘양심’ 또는 ‘주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다윗이 솔로몬보다 먼저 낳은 아들이다. 누가의 족보에 나단이 기록된 것은 그가 마리아의 조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동일한 유다 지파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견해가 타당하게 보인다.
다윗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이며 이새의 막내아들이다.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며 지혜와 용맹과 많은 시편의 저작들로 유명하다(삼상 16장-왕상 2장). 이름의 뜻은 ‘사랑함’이다.
누가복음 3장 32절
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이새
다윗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는 마 1:2-6에 나오는 족보와 거의 같다. 이새는 베들레헴 에브랏 출신으로 다윗 왕의 아버지이다(삼상 17:12). 사 11:1은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아가 출현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오벳
보아스와 룻의 아들이다(룻 4:17, 21, 22, 마 1:5).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룻 1:4) 다윗과 예수를 잇는 가계(家系)의 한 역할을 담당했다.
보아스
룻의 남편이며 살몬의 아들이다. 그는 또한 베들레헴의 큰 부호였다. 보아스는 룻이 모압땅에서 시모 나오미와 함께 돌아왔을 때 그녀를 다방면에서 돕고 그녀의 효성에 탄복하며 그녀와 결혼하게 되기까지 이른다(룻기).
살몬
‘그늘’이란 뜻. 가나안 땅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의 남편이다(마 1:5 비교).
나손
‘점쟁이’란 뜻. 보아스의 조부이다(룻 4:20). 마 1:4와 비교.
누가복음 3장 33절
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아미나답
유대 헤스론 계통인 ‘람’의 아들이다(룻 4:19, 대상 2:10). 그리고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의 부친이기도 하다(출 6:23). 이 이름의 뜻은 ‘나의 친척은 고귀하시다’이다.
아니
‘높은 땅’이란 뜻. 룻 4:19와 대상 2:9에 히브리 이름 ‘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헤스론
‘닫힌’이란 뜻. 유다의 손자로 창 46:12, 민 26:21, 룻 4:18, 대상 2:5, 마 1:3 등에서 언급된다.
베레스
‘파괴’란 뜻. 유다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의 형이다(창 38:24-30, 46:12). 베레스에게서 두 종족이 생겼다(민 26:20, 21, 대상 2:4, 5).
유다
‘찬송’이란 뜻. 야곱의 넷째 아들로 레아의 소생이다(창 29:35, 마 1:2). 그는 밧단 아람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 두 아들을 얻었다.
누가복음 3장 34절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야곱
‘발 뒤꿈치를 잡다’란 뜻.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의 동생이다(창 25: 21-26). 그는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 대한 축복을 가로챘다. 야곱은 하단의 외삼촌댁 라반의 집으로 피하여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고, 그 두 부인과 부인들의 하녀 빌하와 실바를 통하여 12 아들을 얻었으며 이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12 지파가 형성되었다(창 29장). 야곱은 애굽 근교 고센 땅에서 살다가 14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이삭
‘웃음’이란 뜻.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낳은 아들이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태어났으며 그때 그의 아버지가 100세, 어머니는 90세였다(창 17:17, 21:2, 3, 5). 이삭은 어렸을 때 아브라함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증거로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창 22:1-18).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 리브가와 결혼하며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그는 노후에 기럇 아르바 마므레에서 살다가 180세에 죽었다(창 35:27, 28).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란 뜻.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이며 나홀과 하란의 형이다.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으며 이복 누이 사라와 결혼하였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살던 땅과 집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떠났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시로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100세에 얻었다. 그의 신실한 삶은 성경에서 믿음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창 25:1-9).
데라
‘표백’이란 뜻.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이다. 그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하며(수 24:2),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단으로 이사 가서 205세에 죽었다(창 11:24-32).
나홀
아브라함의 조부이다.
누가복음 3장 35절
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스룩
아브라함의 증조부이며(창 11:20-23, 대상 1:26) 이 이름은 ‘활’이라는 뜻이다.
르우
‘친구’란 뜻. 셈의 6대손이다(창 11:19).
벨렉
셈의 자손 에벧의 아들이다(창 10:25-29, 11:16). ‘나뉘다’는 뜻의 이름은 그가 태어날 즈음 세상 사람들이 나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정확히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정화 운동 혹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다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다.
헤버
‘과거’라는 뜻. ‘헤벧’ 또는 ‘에벧’을 달리 번역한 것이다. 그는 노아의 6대손이다.
살라
‘보내다’는 뜻. 노아의 고손이며 창 10:24, 11:13, 대상 1:18, 24에는 ‘셀라’로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3장 36절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가이난
‘철공’이란 뜻. 셈의 손자이나 창 10장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아박삿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을 가리킨다(창 10:22, 24, 대상 1:17, 18), 그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출생했으며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그 후 403년을 더 살다가 438세에 사망했다(창 11:10-13).
셈
노아가 500세에 낳은 아들로 3형제 중 맏이다. 그는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을 피해 아내와 같이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았다(창 7:7, 벧전 3:20). 또한 그는 술 취한 아버지의 실수를 조심성 있게 덮어주어 축복을 받기도 했다(창 9:20-27). 또한 그는 셈족의 조상이다. 그의 이름은 ‘이름’ 또는 ‘명성’이라는 뜻이다.
노아
아담의 10대 손이다. 이 이름이 붙여진 연유에 대해 창 5:29는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고 설명한다. 그는 의인이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6:9).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며 그 심판을 피할 방주를 건축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직 그의 가족과 동물 암수 한 쌍씩만이 구원받았다. 노아가 대홍수를 만났을 때가 600세였으며, 그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다가 950세에 죽었다(창 9:28).
레멕
구약성경에 ‘라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는 182세에 아들 노아를 낳았다. 그는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더 살며 자녀를 낳고 777세에 사망했다(창 5:25, 28-31, 대상 1:3).
누가복음 3장 37절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므두셀라
셋의 후손 에녹의 아들이다(창 5:21-27). 그는 969세까지 산 것으로 기록돼 성경상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대확장’ 또는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에녹
아담의 7대 손이며 야렛이 162세에 낳은 아들이다. 그는 65세에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最長壽者) 므두셀라를 낳으며 그 후 하나님과 동행하며 365세를 향수하며 자녀를 낳았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으므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전한다(창 5:18-24, 히 11:5, 유 1:14). 그의 이름은 ‘교수’ 또는 ‘시작하는 자’라는 뜻이다.
야렛
에녹의 부친으로 마할랄렐이 65세에 낳은 아들이다(창 5:15-20, 대상 1:2). 그는 므두셀라 다음가는 자로(962세) 알려져 있다.
마할랄렐
아담의 5대손이며 셋 계통의 한 조상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 3장 38절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에노스
아담의 손자이다. 셋은 109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으며 905세를 향수했다. 가인의 시대가 폭행으로 표현된 반면 에노스의 시대는 경건으로 표현되었다.
셋
아담의 셋째 아들로 맏아들 가인이 죽인 둘째 아들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다(창 4:25). 그는 아담이 130세 때 태어났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912세에 죽었다(창 5:3-8). 그의 이름은 ‘대신 주다’라는 뜻이다.
아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이다. 그는 타락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로 만드신 아내 하와와 낙원 에덴동산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노동의 수고로움과 해산의 고통을 맛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아담은 막내 ‘셋’을 130세에 낳고 그 후 800년을 더 살다가 930세에 죽었다. 그의 이름은 ‘사람’ 또는 ‘붉다’라는 뜻이다.
하나님
하나님을 아담의 아버지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제시된 족보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아담의 아들로서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불순종한 첫째 아담과 대조하여 비록 암시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하나님께 순종했던 둘째 아담으로 묘사해 준다(고전 15:47). 이와 같이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킴으로써 예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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