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 8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출생에 관한 본문입니다.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는 중에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계시대로 세례 요한이 출생합니다. 본문을 개역개정 성경으로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고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8절-25절, 주석 및 해설 정리
누가복음 1장 8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이 말은 내용상 원래 8절에 부속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의 읽기대로 ‘제비를 뽑아 … 분향하고’라는 표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의 전례’ 곧 ‘제사장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관습(에도스)’이란 8, 9절에 명시된 내용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라 볼수 있다.
제비를 뽑아(엘라케)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이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뤼진 것이다(신 18:10-12, 수 18:6, 8).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민 26:55, 수 14:2), 죄인을 찾아낼 때(수 7:14, 삼상 14:42), 첫 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예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타난다(행 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하셨으나(잠 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다.
주의 성소에 들어가
여기서 ‘성소’(나오스)란 성소(Holy Place)와 지성소(the Holy of Holies)를 합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과 구별된다. 결국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이와 같이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마포및 에봇으로 된 성의(聖衣)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분향하고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한다(시 141:2, 계 8:3).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호와 하나님께 흡향(吸香)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10절).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受胎告)를 받게된다.
누가복음 1장 10절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모든 백성은 … 기도하더니
이 구절의 ‘모든 백성’에 대해 NIV는 ‘운집한 경배자들’(all the assembled worshiper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라오스’(’백성’)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되고 있다. 예배자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다. 이들의 첫째와 섯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다(Geldenhuys). 한편 이 백성들 가운데 연로한 시므온(2:25)과 여선지자 안나(2:36)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이 곳에 모인 백성들은 뒤에 21, 22절에 기록된 백성들과 일치한다(Liefeld).
누가복음 1장 11절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주의 사자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은 ‘사자’, ‘천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곳에 따라 ‘사자’(12:9, 마 2:13), 또는 ‘천사’(마 24:36, 막 12:25, 롬 8:38, 고전 4:9, 1:13, 14)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곳 외에도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한다(1:26, 2:9, 13, 21, 12:8, 15:10, 16:22, 22:43, 24:4, 23).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행 10:4, 7, 12:8-10).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향단 우편
향단과 번제단은 다르다. 번제단은 성소 밖에 위치한다. 매일의 분향은 성막뜰의 번제단 위에서, 제사는 성소안에서 드려졌다.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다는 표시로 번제단에서 향단으로 불을 가져가 향을 사른다(Alford). 주의 사자는 향단과 떡상(진설병을 놓는 상) 사이에 나타났다. 성소를 들어가면 왼쪽에 떡상, 오른쪽에 등대(촛대) 그리고 정면에 분향단이 있고, 그뒤에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게 된다(출 30:1-10, 40:2-27, 아래 그림 참조).
누가복음 1장 12절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놀라며 무서워하니
‘놀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타라크데’은 원형인 ‘타라쏘’의 수동태 과거형이다. 그 뜻은 ‘요동하다’, ‘내적 동요를 일으키다’, ‘마음의 평정을 없애버리다’이다(마 2:3, 막 6:50, 요 11:33). ‘무서워하니’에 해당하는 ‘포보스’은 ‘두려움’, ‘놀람’, ‘경악’,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로 미루어 사가랴는 천사의 출현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놀랐음을 알 수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이다(삿 6:22, 13:22).
누가복음 1장 13절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 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과 비교해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NIV는 현재완료형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에이세쿠스데’은 제1부정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과거의 형태로,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손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메시아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사가랴가 반응한 것을 보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준다. 요한(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난’(대상 3:24), ‘요아네스’(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성경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벨론 유수기(幽囚期)를 전후허서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누가복음 1장 14절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너도 기뻐하고 … 기뻐하리니
이 부분은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과 ‘즐거워하다’로 번역된 ‘아갈리아시스’이 연이어서 나오는 문장이다. ‘아갈리아시스’는 ‘환희’ 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기뻐서 뛰고 소리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을 암시한다.
누가복음 1장 15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 앞에 큰 자
‘큰’에 해당하는 ‘메가스’은 ‘위대한’, ‘덕스러운’,’권위있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0:25, 딤 2:13). 이 말을 32절의 예수께 대해 큰 자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보면, 32절의 ‘큰 자’ 앞에는 ‘주 앞에’라는 수식어가 없음을 알수 있다. 결국 요한은 예수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억할 수 있다(민 6:3, 4).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기별과 일치하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독한 술에 해당하는 ‘시케라’는 강한 독주 등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 부분은 앞부분의 포도주와 독한 술이라는 말과 어울려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별히 엡 5:18을 통해서 술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교를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의 성령 강조이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12회 사용되는데, 그 중 본 장에서 4 회(15, 35, 41, 67절)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누가의 저작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를 무려 41 회나 사용하고 있다. 메시아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은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1장 16절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을 …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렘 3:7, 10, 겔 3:19, 단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눅 3:3).
누가복음 1장 17절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심령’을 나타내는 ‘프뉴마’은 ‘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성질 또는 영향력, 어떤 능력이나 애정, 감정, 욕구 등의 근원’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내는 ‘뒤나메이’은 ‘물려받은 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을 의미한다. 더러는 ‘기적을 행할 때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의미할 때도 있다. 즉, 요한은 엘리야가 지녔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것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사 40:1, 말 3:1-5, 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요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광야에서의 삶(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이나 지위고하(地位高河)를 막론하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벧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는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신다(마 17:12, 막 9:13).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 돌아오게 하고
이 구절은 말 4:6에서 인용한 것으로 난해 구절에 속한다. 일단에서는 이 부분을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파괴된 이스라엘 가정의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그 당시에는 로마와 결탁한 부모, 열심당(Zealots)에 가담한 아들, 바리새파 형과 사두개파 아우 등 가정은 4분 5열이 되어 있었으나 이 분열이 요한을 통해서 회복되리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매튜 헨리(Mattew Henry)는 유대인의 믿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켜 이방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요한은 분열과 불신, 배타와 독선 등을 끝내고 화합과 믿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줄 것이다.
주를 위하여 … 예비하리라
‘백성’이라는 헬라어 ‘라오스’은 공관 복음서에 49회나 사용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이 단어를 ‘무리’, ‘군중’을 나타내는 ‘오클로스’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마 21:26) 이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Liefeld). 여기서 요한의 사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누가복음 1장 18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어떻게 알리요 … 나이 많으니이다
‘어떻게’에 해당하는 ‘카타 티’은 ‘무엇에 의하여’라는 뜻이다(in what way, MLB).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하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다. 20절과 연결하여 보면, 이것은 사가랴의 겸손이 아니고 불신의 소치임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마리아의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는 질문은(Haw shall this be, RSV) 45절로 미루어 천사의 메시지를 믿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사가랴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고, 마리아의 질문은 성취 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늙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스’은 나이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민 4:3, 8:24, 25에 보면 레위인들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러나야 된다고 하였다. 물론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날 정도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사가랴의 초조함이나 불신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누가복음 1장 19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천사가 … 가브리엘이라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이다. 성경상에서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단 8:16, 9:21)과 ‘미가엘’(단 10:13, 21, 12:1, 유 1:9, 12:7) 둘 만이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이며 미가엘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탄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구약 외경 에녹서(Book of Enoch)에는 4명의 천사장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은 미가엘(Michael), 라파엘(Raphael), 우리엘(Uriel), 가브리엘(Gabriel) 등이다. 한편 ‘하나님 앞에 섰는’이라는 말에서는 권위와 위엄(威嚴)이 느껴진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권위와 위엄이 있긴 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내가 비록 천사장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자이고,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와 함께 만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그 앞에 서있는 자이다’.
좋은 소식(유앙겔리사스다이)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유앙겔리조마이에서 왔다. ‘유’은 ‘좋은’(good)을 뜻하며 ‘앙겔로’은 ‘메시지를 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합성어 ‘복음의 선포’라는 뜻으로 번역된다(Wuest). 그리고 ‘유앙겔리조마이’는 공관복음에서 모두 11회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10회나 사용되었다(본 절, 2:10, 3:18, 4:18, 43, 7:22, 8:1, 9:6, 16:16, 20:1). 따라서 누가에게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다(Liefeld). 여기서 8절에 나타난 사가랴의 불신앙의 질문에 천사 가브리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헬라어 성경의 이 부분의 문법적 구조에 따르면, 천사의 대답은 사가랴의 불신의 질문에 뒤이어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사가랴의 의심에 찬 말문을 막고 불신을 조기에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1장 20절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 내 말이 이루리라
‘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은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사용하는 불변사이다. 이 단어는 말을 강조할 때나 좀 더 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가 이 팔에 얼마나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나를 보게 된다. 의심의 결과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이 꼭 형벌이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에 대한 예시로 벙어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Alford). 또한 62절과 비교해 보면 사가랴는 벙어리뿐만이 아니라 귀머거리까지 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의 벙어리됨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다.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는 오랜 침묵을 통하여 의심의 질문을 던지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67-80절).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살펴보면 천사의 말은 이루어지도록 예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의 되는 날까지’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다른 어떤 사람이 거부한다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누가복음 1장 21절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백성들이 … 기이히 여기더니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제사장이 오래 지체하게 되면 백성들은 제사장이 어떠한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Alford). 탈무드(Talmud)에도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는 잠시 동안만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Lenski). 따라서 제사장들은 가능한 한 성소에서 속히 나와 백성들을 축복하고 해산시킨다. 이 구절에서 보면, 분향이 행해질 때 밖에서 기도하던(10절) 백성들은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그들은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어떤 과오로 인해 죽지 않았나 걱정했을 것이다(레 10:1, 2).
누가복음 1장 22절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는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다(민 6:24-26). 그러나 사가랴가 성소를 나오면서 시종 일관 침묵을 지키자 백성들은 성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상(異像)
헬라어에서 사용되는 ‘이상’ 또는 ‘환상’이라는 말은 모두 3개가 된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에 해당하는 ‘와타시아’, ‘보여지는 것’을 나타내는 ‘호라마’, ‘봄’, ‘외관’, ‘자태’에 해당하는 ‘호라시스’등이다. 이구절에서는 ‘와타시스’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상’이라는 말은 대개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본 것, 꿈이나 황홀경 중에 본 것, 혹은 선지자에게 계시된 것 등을 의미한다.
형용(形容)으로
사가랴는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기에 손짓, 몸짓으로 그의 뜻을 전달하였다. 사가랴의 말 못함은 백성들에게 성소 안에서 그가 지체한 원인에 대한 충한 답변이 되었고 또 그가 이상을 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누가복음 1장 23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직무(레이투르기아스)
이 말은 원래 자신의 ‘공적인 사무’를 뜻하며 자신의 희생이나 비용으로 수행되는 ‘공적인 봉사’(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한다(고후 9:12, 빌 2:17, 30, 히 8:6, 9:21). 특히 여기서는 제사장적 사역의 의미를 나타낸다. 사가랴는 듣고 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수행한다. 사가랴의 희생적인 직무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누가복음 1장 24절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엘리사벳이 … 숨어 있으며
엘리사벳이 왜 숨었는가에 관해서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 자신이 나이들어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해서 숨은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삿 13:13, 14의 내용처럼, 임신한 자신을 부정한 생활에서 구별하고 이와 아울러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할 듯하다.
누가복음 1장 25절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이 구절에는 깊은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내 부끄러움’이란 유대인 제사장 가문에서 아이가 없다는 세인(世人)들에 대한 부끄러움이다(창 30:23, 삼상 1:6-10). 여성의 불임은 유대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수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오랜 세월의 고통 가운데서 큰 결실을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기쁨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부끄러움(오네이도스)
이 말은 ‘비난’, ‘불명예’, ‘모욕’이라는 뜻을 갖는다. 신약성경 중에는 본 절에서만 사용된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치심 정도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으로 빠뜨리는 치욕을 뜻한다.
없게 하시려고(아펠레인)
이 단어는 원형이 ‘아파이레오’으로서 ‘치워버리다’, ‘가져가다’, ‘베어버리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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