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은,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쓴 것임을 밝히고 세례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의 서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 시대에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자녀가 없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을 개역개정 성경으로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1절-7절, 주석 및 해설 정리
누가복음 1장 1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우리 중에
본 절에서 ‘우리’는 구체적로 누구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예수에 관한 나름대로의 산 체험과 증거들을 보호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저자 누가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로 ‘누가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문의 ‘우리’와 접촉하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다고 하면서 적잖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니 지나친 논리적 비약을 하거나 사건을 임의로 축소, 확대하기도 하며 또한 특정 종파의 교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을 왜곡시키거나 새로운 기사를 꾸며내어 기록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의 기록은 모두 객관성과 정확성이 매우 부족해 ‘외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저서들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데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개연성(蓋然性)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가 여기서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기록에 객관성과 정확성과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예수의 목격자들(witnesses)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어 나오는 2절과 함께 연결해 본다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증인들임이 분명하다(Alford).
이루어진 사실(톤 페플레로포레메)
이 단어는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플레레스’과 ‘가져오다’의 뜻을 가진 ‘페로’이 결합된 ‘플레로 포레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미 ‘성사된 일’, ‘성취된’(accomplished) 일이라는 뜻이다. 또한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어진 일’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말은 ‘벌써부터 예정되었던 계획을 따라 성취된 확실한 사건들’이라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다(Merrill C. Tenney). 한편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성취된’(딤후 4:5, 17) 그리고 ‘확인된’(롬 4:21, 14:15, 히 6:11, 10:22)으로 사용됨으로써 위의 사실을 더욱 확증시켜 준다. 실로 예수의 생활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서두에서부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KJV는 이 부분을 ‘우리들이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들’(those things which are most surely believed among u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여 믿게 된 사실들’이라는 것으로서 앞으로 소개될 이 누가복음이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말해준다. 실로 본서를 통해 누가는 사료(史料)들과 정확한 날짜를 비교적 소상히 언급함으로써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누가복음 1장 2절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처음부터(아프 아르케스)
‘처음부터’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프 아르케스’ 중 ‘아르케’란 말은 ‘모든 일의 시작’에 대해 또는 ‘말해진 일들의 시작’에 대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라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부터’라는 의미, 또는 ‘침례 요한의 활동의 시초에서부터’(3:1, 2, 행 1:21, 22, 10:37)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부터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의 목격자들이다.
말씀의(투 로구)
여기서 이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말씀’(로고스)은 다양하고 빈번하게 사용된다. 특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가 기술한 요 1:14에서는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었다”(incarnation)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 말씀이 성육신보다 선재(先在)했음을 암시한다(Lenski).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천지가 창조되었으며(요 1:3), 그 말씀은 생명이 있고 또 사람들의 빛이 된다고 설명한다(요 1:4). 또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한다(요 1:14). 이에 비해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복음이다. 사실 고대 헬라의 작가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그에 걸맞은 행동을 연관시켜 그 중요성 강조했었다. 행 1:1에서도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기술할 때 ‘행하시며’와 ‘가르치시기를’이라는 말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어쨌든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그 복음의 말씀은 1절의 ‘이루어진 사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Liefeld).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아우토프타이 카이휘페레타이)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내내 곁에서 목격자 되고 일꾼 되었던 제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을 위해 그 같은 사도적 증거(witnesses)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본 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이 고백되고 있다. 여기서 ‘목격자’에 해당하는 ‘아우토프타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아우토스’과 ‘보다’의 뜻을 가진 ‘호라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스스로 본 자’, ‘직접 자기 자신이 본 자’(eyewitnesses, 목격자)라는 뜻이 된다(Robertson). 이는 곧 누가의 복음서 기록을 가능케 했던 각종 정보를 제공해준 자들로서 그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직접 그분의 활동상을 목도한 산 증인이다. KJV는 이 부분을 ‘말씀의 일꾼’(minister of the word)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실로 예수 공생애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외에 70인 전도대 및 예수를 수종 들던 여인들(막 15:40, 41),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가 포함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복음의 권위와 내용상의 완벽을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 해지는 것은, 1절의 ‘우리’는 바로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본문에서 누가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준비한 모든 자료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뺀 것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누가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자신에게 전해진 구전(Oral tradition)과 기록(Written tradition)이 신빙성 있고 정확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전하여 준’(파레도산)은 제2 부정 과거 복수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서 어김없이, 확실히 건네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여기서 ‘구전’(口傳)을 가리킬 수 있으나(고전 11:23, 15:3) 반드시 구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24:20, 행 1:20, 3:13). 즉 이것은 구전과 기록 문서를 포함한 일종의 ‘전승’(파라도시스)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실로 누가는 최초 목격자와 일꾼들이 전해준 전승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 구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기에 복음에 있어서만은 직접적 증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최초 증인의 확실한 보증 등의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력을 저술하려고(아나태사스다이 디에게신)
‘저술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태사스다이’는 ‘차례로’, ‘잇달아’라는 뜻을 가진 ‘아나’과 ‘고정된 곳에 놓다’,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타쏘’의 합성어인 ‘아나타쏘마이’이 원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임의대로 복음을 기록함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차례대로 순서에 따라 편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력을’에 해당하는 ‘디에게신’은 ‘디에게오마이(’완전히 인도하다’, ‘자세히 말하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8:39, 막 5:16, 9:9, 행 8:33, 히 11:32) 이는 곧 내용을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함을 말한다.
붓을 든(에페케이레산)
이 단어는 ‘손을 대다’, ‘착수하다’, ‘시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에피케이레오’으로서 흔히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의 의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실패나 비난에 유념치 않고 무엇을 시도하다’로 이해되곤 했다(Robertson). 이로 보 건대 이 일을 착수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뒤늦게 누가가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기록된 자료(Written tradition)들이 부실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물론 누가는 자기 앞의 다른 기자(記者)들의 불완전함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경쟁자적 입장에서 붓을 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에 관한 증인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방대한 정보와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상세하고 정확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의도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여러 내용들을 본서에서는 다루고 있다(5:1-11, 7:11-17, 36-50, 8:1-3, 10:25-37, 15:1-32, 19:1-11, 24:13-53). 또한 그는 기존의 기록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답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누가복음이나 각 기록들을 통해 확대되거나 모방된 외경들이 이단 교파나 특수한 종파 가운데서 사용되기도 했다(예:히브리인 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 결국 이 부분은 예수의 교훈과 행적을 담은 당시의 각 기록이 나름대로의 독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다른 기자들과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자신도 감히 기록하겠노라는 복음서 기술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람이 많은지라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누가는 분명히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느 누구의 기록된 자료를 참고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4 복음서를 비교하여,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빼고 다른 부분을 놓고 본다면, 누가복음의 초반부는 누가가 독특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1절의 ‘우리’와 연결하여 본다면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진다.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누가가 ‘우리’와 많은 곳에서 여러 활동을 했던 것을 보게 된다(행 16:10-17, 20:5-14, 21:1-18, 27:1-22). 렌스키(Lenski)는 누가와 마가가 바울의 첫 투옥 중에 서로 접촉을 했고, 2차 투옥 시에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우 사이가 되었고, 따라서 둘 중 먼저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그 내용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볼 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본서의 ‘우리’와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저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기록은 많은 기록들 가운데서 특별히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말 어미에 해당하는 … 지라(에페이데페르)고 하는 이 접속사는 ‘ … 이므로’란 뜻의 ‘에페이’과 ‘확연히 알려진 것’이라는 뜻의 ‘데’, 그리고 뜻을 깊이 하거나 강조하는데 쓰이는 후 접사 ‘페르’ 등이 합성된 단어로서 ‘ … 이므로’, ‘참으로 … 이니까’, ‘생각해 보건대’라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가진 뜻으로 보아 앞선 사실이나 기존의 잘 알려진 일에 대한 회상과 확인을 나타내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이곳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 헬라 문학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헤로도토스(Herodotus)나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역사서의 서두에서도 이 단어가 전통적인 문체로 사용되고 있다(Robertson). 누가는 헬라인이었다. 그래서 헬라 문학의 전통 양식에 따라 가장 격조 높은 고전 헬라어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1:1-4). 이에 대해 바클레이(Baclay)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마치,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에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누가복음 1장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그 모든 일을 … 자세히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가는 의사였다고 한다(골 4:14). 따라서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여기서 자신의 복음서 기록의 성격을 제시한다. 먼저 ‘그 모든 일’(파신)을 나타내는 원어는 중성 복수로서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 예수 중심으로 발생했던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근원부터’(아노덴)는 ‘처음부터’, ‘맨 시초부터’ 또는 ‘일찍부터’(행 26:5)라는 뜻으로, 2절의 ‘처음부터’란 말과 직접 연관은 없으나 의미상 유사성을 지닌다. 아마 누가는 이 팔을 쓰면서 분명 본서 1, 2장에 언급된 탄생 기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자세히’(아크리보스)는 원래 ‘첨단’ 또는 ‘극점’을 의미하는 ‘아크론’에서 나온 말로써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열정적 태도를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매우 정확하게’, ‘엄밀하게’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차례대로’(카데크세스)는 ‘순서에 맞추어’, ‘연속적으로’라는 뜻으로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서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시간순을 존중하여 연대기적 기술 방법을 택했다고 소개한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각 사건들을 시간적 배열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주제 의식을 갖고 신중히 체계화, 조직화했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9:51-18:8은 주제에 의해 사건과 교훈이 나열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누가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본 복음서를 기록해 나갔음이 밝혀진다. 즉 첫째, 역사성, 둘째, 정확성, 셋째, 논리적 일관성의 원칙에 따랐으니 이는 또한 누가복음 전체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루어 살핀(파레콜루데코티)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따르다’, ‘집요하게 무엇을 탐구하다’는 등의 뜻으로서 고대 헬라어에서 흔히 사용되던 동사의 완료 능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누가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기록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 언급한 말로써, 누가는 복음서를 기술하기에 앞서 주도 면밀하고도 심층적인 연구와, 정확하고도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기록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고 정확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도(카모이)
이는 ‘붓을 든 많은 사람’(2절)과 짝을 이루는 말로써 누가 자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집필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
누가가 기록한 두 책(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명시되고 있는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전하는 바가 별로 없다. 누가가 수신인의 진짜 이름 대신 가명으로 사용한 것이거나 또는 상징적인 이름을 사용한 것이라고 보기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은 그가 도미티안 황제의 조카로서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였을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Streeter). 그렇게 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가명이 되고 만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고유명사이며 특히 누가가 그의 이름에 붙여 사용하는 ‘각하’라는 명칭을 볼 때 그가 실재(實在)한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데오빌로가 누가의 학우이거나 발행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Liefeld, E. J. Goodspeed, Grevdanus).
여기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데오스’(하나님)와 ‘필레오’(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라는 단어들의 합성어로서 이를 합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것에 근거하여 이 명칭이 B.C. 3세기경에 흔히 사용되던 이름으로서 어떤 특정 개인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 즉 신앙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Origen, Bruce).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한 성도의 이름이라는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할 뿐 상징적 이름이나 가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어서 있었는데 누가는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의 수신자로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4절).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비록 본서가 데오빌로를 수신자로 명시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직 데오빌로 개인에게만 헌정(獻呈)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책을 권위 있고 명성이 높은 한 개인에게 헌사(獻詞)하는 경우는 당시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책은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었다(Julicher Fascher).
더욱이 본서의 전반적인 기류는 탈(脫) 유대적이요, 범세계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누가의 복음서는 이방 세계, 특히 헬라주의에 깊이 물든 신앙인들에게 보내졌을 뿐 아니라 그들을 발판으로 하여 전 세계 모든 신앙인들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각하’(헬, 크라티스테)라는 말은 ‘지존하신’, ‘가장 고상한’이란 뜻으로 형식적이고 친근한 인사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례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부분 어떤 특정한 지위나 관직에 있는 신분이나 하나의 공식적인 직함으로 사용되고 있다(행 23:26, 24:3). 따라서 본문의 데오빌로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Noval Geldenhuys, Ramsay).
좋은 줄 알았노니(에돝세 카모이)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이 3절 문장 서두에 온다. 여기서 ‘에돝세’는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도케오’의 과거형이다. 실로 예수에 관해서 기록을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고, 주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또한 인간들에게도 큰 기쁨이다. 누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문장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KJV와 NIV를 통해서 보면 이 구절의 의미가 더욱 명백해진다. NIV는 이유를 나타내는 단어 ‘since’를 이 구절 문장 서두에 사용하고, KJV는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구문을 사용해 성경을 기록하는 일이 왜 좋은지를 밝히고 있다(It seemed good to me also). 실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부터의 모든 일들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복음 1장 4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배운 바(카 테케데스 로곤)
‘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데스’는 ‘카테케오’(’귓가에 울리게 하다’, ‘말로 가르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로 미루어 데오빌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전으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책의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에게 이 복음서 기록을 의뢰하였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누가가 기록한 이 책을 출간해 주었을 수도 있다(Henry, Liefeld, Geldenhuys). 한편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로곤’은 ‘로고스’(’말씀’, ‘사건’)의 소유격 복수 형태이다. NIV와 KJV는 이 단어를 ‘사실들’, ‘일들’(things)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알포드(Alford)는 이 단어를 ‘말씀에서 표현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배운 바’는 말씀을 통해서 배운 것들을 의미한다.
확실함(텐 아스팔레이안)
이 단어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과 ‘미끄러워 넘어지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스팔로’의 합성어이다. 즉 ‘확실함’이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견고히 서는 것이다. 실로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우리를 견고히 세우고 온전케 하며 확신을 같게 한다(딤후 3:15-17). 사실 분명하지 않은 바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누가는 진리에의 확신과 예수께 대한 ‘확실함’을 간직하게 하기 위하여 붓을 들고 있다. 한편 이 책을 받아 볼 데오빌로는 구전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것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따라서 구전을 통해 믿음이 성장한 그는 많은 이단 사상에 도전(挑戰)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는 유대교의 박해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협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이단자들이 성행했다. 혹시, 데오빌로 역시 이런 영향에 위협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누가가 기록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복음 기사를 통해서만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 기사가 이단 사상들의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고, 또 때로는 중요한 공격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엡 6:11-18). 그리고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복음의 확실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Liefeld).
알게 하려 함이로라(에피그노스)
이 단어는’ … 에 부가하여’, ‘ … 에 더하여’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과 ‘알려고 배우다’, ‘알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기노스코’의 합성어 ‘에피기노스코’ 의 부정 과거 형태로 사용되었다. 즉, ‘ … 을 철저히 알다’, ‘정확하게 알다’라는 뜻이 된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더하려고 하였다. 기존의 지식에 완벽함을 더하는 것은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교육자의 위치로, 또는 증인의 위치로 이끌어 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1장 5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유대 왕 헤롯 때에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라는 의미가 된다. 헤롯 대왕에 대해서는 마 2:1의 주석을 참고하라.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버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가(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아비야 반열(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여기서 먼저 ‘반열’(에페메리아)이란 ‘ … 동안’, ‘때마다’, ‘만큼’ 등의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과 ‘날’, ‘하루’ 등의 뜻인 ‘헤메라’의 합성어로서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아론 자손 곧 제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 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한편 24 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다(대상 24:10).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8절 주석을 참조하라.
사가랴요 엘리사벳이라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엘리사벳(Elizabeth)은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출 6:23).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다(Geldenhuys).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엘키사벳’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출 6:23) 매우 의미 있는 일치로 본다.
누가복음 1장 6절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이 두 사람이 … 의인이니
이 말은 원래 구약적 개념으로서 율법적으로 온전한 자에게 붙여진 관용구였다. 여기서 ‘의인’(디카이오이)이란 ‘옳은’, ‘똑바른’, ‘정직한’ 등의 뜻을 지닌 ‘디카이오스’의 변화형으로서, 특별히 이 말이 법률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정당한 판단에 따른 긍정적인 시인(是認) 내지는 평가를 받은 자들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단어가 ‘하나님 앞에’(in the sight of God, NIV)라는 병행 문구와 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확실시된다. 즉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바른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자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의인’이란 말이 ‘순전히 윤리적인 측면의 인격에 대한 평가이기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인격을 가리킨다’고 했다. 사실 인간이 그 윤리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다(롬 3:10). 그런 까닭에 성경적인 의미의 ‘의’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서 그 죄와 죄의 대가를 제거하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디카이오스’의 의미를 결정지어 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시며 그 말의 의미를 변치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의의 기준이시다(Wuest).
진정 인간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믿음’만으로 의인이 될 수 있다(롬 3:20-24). 그런 점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본성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인이기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서’ 의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이 ‘의인’이란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로 간주되었었는데(창 6:9, 7:1, 18:23-28, 겔 18:5-9)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경건한 인물에게만 붙여졌다. 이것은 유대인의 이상형이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신약 성경에 와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고 자랑했던 바울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율법 시대의 의인관(義人觀)에 따른 표현이었을 뿐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복음관에서의 평가로 볼 수는 없다. 한편 이러한 구약적 의인관에서 볼 때 특히 누가복음 내에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Robertson).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침례 요한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계명과 규례
여기서 ‘계명’을 나타내는 ‘엔톨라이스’는 ‘명령’, ‘교훈’ 등의 뜻을 지닌 ‘엔톨레’의 복수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고 지시하신 권위에 찬 명령들을 의미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이 ‘엔톨라이스’를 주로 ‘계명’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다(롬 7:8-13). 그리고 ‘규례’를 가리키는 ‘디카이오마신’은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 ‘공의를 행하다’라는 뜻인 ‘디카이오오’ )에서 유래한 말로써 ‘하나님께서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옳게 여기시는 것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결국 위의 ‘계명’과 ‘규례’는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룩하고 온전한 명령과 생활 규범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혹자(Bengel, Calvin)는 이 양자를 분리하여 ‘계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심판의 근거가 되는 종교, 도덕적인 법령(法令)을, ‘규례’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의식적이고 제의적인 예법(禮法)을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비해 또 다른 학자들(Bruce, Lenski)은 이 양자를 대조시키지 않고 히브리인들이 즐겨 쓰는 셈어적인 중복 기법으로 보아 두 개념을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법령을 강조하기 위해 중복적으로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일 뿐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본 주석은 후자의 견해를 선호한다.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여기서 ‘흠이 없이’(아멤프토이)란 ‘비난받거나 책망받을 것이 없이’라는 뜻으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켰다는 사실을 수식하고 있다. 실로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종교.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다.
누가복음 1장 7절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엘리사벳이 … 무자(無子)하고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 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Barclay).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수태를 못하므로’라는 표현 가운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카도티’란 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 저자인 누가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행 2:45, 4:35). 이 ‘카도티’는 대략 ‘ … 때문에’, ‘ … 만큼’, ‘왜냐하면’ 등의 뜻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기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창 17:16-17-사라, 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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