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 67절부터 80절까지의 말씀은, 아들 요한이 출생한 이후에 성령에 충만함을 입은 사가랴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사가랴는 예언을 통하여 세례 요한의 미래를 말하며 그가 그리스도의 앞길을 평탄하게 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본문을 개역개정 성경으로 통독하며 주석과 해설을 묵상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67절-80절, 주석 및 해설 정리
누가복음 1장 67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본 장 원문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관사를 계속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을 계속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일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진행되어 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앞으로 될 모든 일들 역시 성령의 세밀하신 역사 아래 진행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눅 1:15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석을 참고하라.
예언하여 이르되
예언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지를 엿보게하는 구절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 이하로부터 전개되는 사가랴의 축가(Benedictus)는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사역과 역사하심을 구원론적 차원에서 제시하고 그것을 교훈과 예언의 형식을 빌어 표현했다. 내용상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반부는 메시아를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후반부는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축가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찬가와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구절을 엮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시 105:8, 9, 106:45, 111:9, 사 42:7, 렘 11:5, 겔 29:21).
누가복음 1장 68절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찬송하리로다(율로게토스)
'율로게토스’란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을 베푸신 사람에게(42, 45절에서처럼 ‘복되도다’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64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68-79절은 찬송의 말씀이자 축복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Liefeld).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이란 말은 17절과 77절에서 언급된 ‘주의 백성’과 같은 말이다(54절 주석 참조).
돌아보사(에페스케프사토)
이 단어는 원형이 ‘에피스케프토마이으로서 3인칭 과거 직설법으로 쓰였으며 ‘도움을 주시기 위해 살펴보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주권적 개입으로 그 백성들을 돌아보사 그들을 은혜 가운데로 인도해 내신다는 사상을 짙게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의 여러 의미 가운데는 ‘방문하다’, ‘탐구하다’, ‘찾아내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 백성들을 ‘방문하시거나’, ‘돌아보신다’는 의미는 7:16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 영적인 의미가 강화된다(H.W.Beyer, TDNT., II, 599-622).
속량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트로시스’은 ‘구속’, ‘구원’, ‘해방’, ‘자유’ 등의 뜻이며 그 동사형인 ‘뤼트로’는 ‘몸값을 치르고 놓아주다’는 뜻이다. 신약 시대의 한 파피루스에서는 이 단어가 ‘속죄금을 치르다’는 전문적 법률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한 특정인이 죄인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그 사람을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인생의 죄값을 십자가상의 저주로써 대신 치르시고 죄와 사망에서 인생을 구원해내신 것을 나타낸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신약 성경에서는 ‘값을 치르고 구원함’, ‘구속’(자)의 뜻인 ‘아폴뤼트로시스’이 주로 쓰인다(21:28, 롬 3:24, 8:23, 고전 1:30, 엡 1:7등). 한편 구속의 개념은 신.구약을 통털어 성경 전체에 폭넓게 깔려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구속(속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파다’과 ‘가알’의 번역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장자의 속건(贖錢)으로 돈 지불을 요구할 때 사용했으며(출 13:2, 11-16),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출 21:8). 후자는 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땅을 회복하는 것이나(레 25:26, 룻 4:4) 서원한 것을 도로 물리는 것을 말한다(레 27:13). 특히 이 말을 신학적 내지는 교리적 의미로 이해할 때, 구약에서의 구속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다.
누가복음 1장 69절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구원의 뿔
근동 지역에 사는 뿔가진 짐승들은 매우 강한 힘을 지닌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뿔은 흔히 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능력(왕상 22:11, 단 8:3)과 왕권(단 7:23, 8:20-22)을 상징하는 것이니 만큼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사가랴는 이 구원을 일종의 힘으로 생각한듯하며, 구약적 개념을 빌어 표현함으로써 이 구원자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온 바로 그 메시아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그 종 다윗의 집
‘집’이라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가족’과 ‘종족’으로서의 뜻을 나타내기도한다(33절 주석 참조). ‘다윗의 집’은 27절과 2:4에서처럼 가문이나 자손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표현이 사가랴 당시에 유대 전역에 있던 메시아 사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와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세주가 이스라엘을 열방의 위협에서 건져내었던 다윗 왕가 중에서 나타난다는 사상이 유대 민족 사이에 팽배했었고 또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종 다윗’이라는 표현은 오실 메시아의 선재성(先在性)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처럼 위대했던 다윗도 그의 종이었음을 보아 그의 위대함과 놀라운 위치를 증거해 준다. 그리고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은시 132:17의 말씀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메시아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누가복음 1장 70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거룩한 선지자의 …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문구는 단순한 삽입구가 아니라 히 1:1과 같이 예수의 메시아 역할이 구약에 기원을두고 있음은 물론 구약의 지지를 받는 것임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는 문구이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율법서나 선지서, 시가서 등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언급된다(마 1:18-25 주제 강해 ‘메시아 예언과 그 성취’의 도표 참조).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에서의 ‘선지자’라는 의미도 문자 그대로의 선지자라기보다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Liefeld Geldenhuys).
누가복음 1장 71절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원수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드로스’이 형용사로 쓰이면 ‘적개심 있는’, ‘미워하는’이란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이 대부분 민족적이고 정치적 성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사가랴는 원수라는 말을 로마 세력 혹은 로마의 사주를 받은 헤롯에 빗대어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축가가 구속 역사의 진행 과정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측면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원수’는 곧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훼방하는 사탄과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마 13:39).
누가복음 1장 72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긍휼히 여기시며 …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본 절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언급된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언약 관계는 그 백성의 범죄와 완악성으로 인하여 오래전에 이미 파기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73절에서 특별히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칭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외에도 아담(창 3:15), 노아(창 6:18), 이스라엘 백성(신 29:1-30:20), 다윗(삼하 7:5-16) 등과 더불어 구속사의 중요 시기마다 언약을 체결 하사 신앙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심과 아울러 당신의 구원 계획을 약속의 형태로 제시해 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언약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고 또한 성취되었다.
누가복음 1장 73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창 22:16-18의 내용으로서 그의 후손들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구원은 단지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리라고 하는 정치적 해방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소위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 절의 ‘맹세’는 72절의 ‘언약’과 더불어 교차 대구법적으로 구성된 본 축가의 중심 위치에 놓여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과 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하심을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에서 언약과 맹세가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밝혀주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다(시 106:45).
누가복음 1장 74절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원수의 손
71절 주석 참조.
건지심을 입고(뤼스덴타스)
이 단어는 원형이 ‘뤼오마이’로서 과거 수동형으로 쓰였으며 ‘끌어내다’, ‘구출하다’, ‘구원하다’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헬라 세계의 불멸의 신들(Gods)과 또 그들과는 대조되는 유한한 인간 존재들과 같이 존재론적 법칙들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느 9:8), 자기 이름을 위하여(시 79:9),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바로 그의 이름이 구원자이시다(사 63:16). 본 절과 75절 내용은 하나님이 그 신실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에 따라 언약을 주권적으로 성취시키시는 이유 혹은 목적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은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적 또한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77절) 더욱 확연해진다. 한편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하심 가운데에서의 보호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의 믿음 혹은 신뢰가 요구된다(시 22:4, 5, 34: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는 자를 구원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아끼지 않으신다(W Kasch, TDNT, VI. 998-1003).
누가복음 1장 75절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종신토록(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헤몬)
헬라어 ‘파사스’는 원형이 ‘파스’으로서 복수 목적격으로 쓰였으며 ‘모든’, ‘온’, ‘모두’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헤메라스’는 원형 ‘헤메라’의 복수 목적격으로 ‘날’, ‘낮’, ‘때’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우리의 모든 날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지상에서의 우리의 평생을 의미한다. 주의 앞에서(에노피온 아우투). 헬라어 ‘에노피온’은 ‘ … 앞에’, ‘ … 의 목전에’, ‘ … 가운데’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문구의 의미는 ‘그의 목전에서’ 또는 ‘그의 면전에서’가 된다. 이는 제의적인 용어로써 이 어구에 담긴 의미 가운데는 제사장적 섬김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가 본 구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Lenski).
성결과 의(엔 호시오테티 카이 디카이오쉬네)
‘성결’에 해당하는 ‘호시오테티’는 원형 ‘호시오테스’의 단수형이다. 이 단어는 주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쓰이며 신약성경에서 ‘거룩함과 의로움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2회 나타난다. 본 절에서 이 단어는 구원의 시대에 사는 신자들의 삶을 묘사하며, 엡 4:24에서는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가리킨다. ‘의’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는 70인 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사 5:7)로 사용되었으며, 랍비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가장 많은 공로가 쌓이게 되는 행위들 중 하나로서의 자선행위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즉 소극적으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적극적으로는 ‘성결과 의’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시 5:8, 9).
누가복음 1장 76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 중의 하나이다(32절 주석 참조). 그리고 ‘선지자’ 세례 요한은 두 가지 면에서 선지자보다 큰 자(마 11:11) 혹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1) 시대적인 위치의 면에서, 그는 신약과 구약의 가교적(架橋的) 위치에 있었다. 그는 예수와 동시대에 살면서 친히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즉 그는 복음의 여명이 동터오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2) 사역의 내용면에서,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구약에 탁월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메시아의 앞길을 평탄케 하는 사역을 직접 수행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 뿐이었다. 한편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서 표현이 되고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서 표현이 되는 것은 현격한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서로가 중요하고도 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앞서 가서 … 예비하여
이 말씀은 사 40:3, 말 3:1, 4:5 말씀의 성취이며, 이 구약 말씀과 비교할 때 누가는 요한을 엘리야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진 자로서(1:17)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선구자였던 것이다(3:3-6, 마 3:1-6).
누가복음 1장 77절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주의 백성
17절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 54절 ‘그 종 이스라엘’ 주석 참조.
죄사함(아페세이 하마르티온)
‘사함’에 해당하는 ‘아페세이’는 ‘용서’, ‘해방’, ‘탕감’의 뜻을 나타낸다. 성경상에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죄 사함’이라는 말이다.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는 예수의 대속 죽으심을 예표한 것이므로 반복적으로 드려져야 했다. 그러나 흠 없고 완전한 희생 양이신 예수는 단 한 번의 희생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죄 사함을 이루셨다(히 9:25, 26). 또한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용서하시고(사 1:18), 한번 용서한 죄는 기억치도 않으심으로써(사 43:25), 죄에 대한 앙금이나 미련을 갖지 않으시며 그 흔적을 조금도 남기시지 않으시며(시 103:12, 미 7:19), 완전하고도 무한한 죄사함을 이루신다(Lenski).
구원을 알게 하리니
구원을 알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행되어 나온 ‘죄 사함’이다. 즉 회개와 함께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넘어선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과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누리며 참 생명을 누리도록 피조되었으나 인간의 죄악 된 행위가 둘 사이를 갈라놓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손을 내밀 때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기 때문이다(사 59:1,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행위 가운데는 철저한 회개와 죄 사함의 요청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요한은 후에 그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된다(3:3).
누가복음 1장 78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돋는 해가 … 인도하시리로다
캄캄한 어둠을 물리치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관한 이미지는 이미 말 4:2에 나오며 사 9:2, 60:1에는 ‘빛’으로 그리고 민 24:17에는 야곱에게서 나온 한 ‘별’로 등장한다. 이는 모두 흑암과 죽음을 몰아내고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를 도래케 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다.
이하여(에피스케프세타이)
이 단어는 68절에서는 ‘돌아보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메시아의 도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뜻함을 암시한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이 구절은 사 9:2를 인용하고 있다(마 4:16). 이는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제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1) 전쟁이나 투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평화(14:32, 행 12:20), (2) 하나님과 인간 간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화목(고후 5:19), (3) 심령의 평화(골 3:15)등을 의미한다. 이 평강은 신. 구약을 통틀어 풍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학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본 절에서 메시아와 평강의 길은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사 9:6에서 메시아는 평강의 왕으로서 예언된 바 있으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하였다(롬 14:17).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평안을 성도들에게 끼치노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14:27).
인도하시리로다(카튀뒤나이)
원형 ‘카튜뒤노’은 ‘곧게 하다’, ‘똑바로 하다’, ‘바로 안내하다’ 등의 듯을 나타낸다. 즉 왜곡되고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똑바로 가게 하는 것이다. 밝은 빛 가운데서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평강의 길은 주께서 가시는 길이며 그분께서 예비하신 길이다. 구원의 빛이 길을 잘못 가지 않도록 우리의 앞을 비추어 평강의 길로 나가게 한다. 한편 이렇게 함으로써 사가랴의 찬가는 끝을 맺는다. 사가랴 찬가는 첫말이 ‘찬송하리로다’로서 시작되어 ‘평강’이라는 말로 그 끝을 맺는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찬송’과 ‘평강’으로 특징 지워지는 것을 반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으로써 그분과 인격적 교류를 갖고 그의 구원의 계획 속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평강을 얻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주시는 것은 평강이다.
누가복음 1장 79절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1장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자라며(유크사넨)
신체적 성장을 뜻하는 말이다. 요한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나타낸다.
심령이 강하여지며
요한은 신체적 성장과 아울러 영적으로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이 성장 과정은 예수의 성장 과정과 흡사하고(2:40, 52), 어린 사무엘이 성장할 때와도 유사하다(삼상 2:26).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린아이의 자라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다.
빈 들에 있으니라
혹자는 요한이 사해(死海) 부근의 유대 광야 어느 곳에 있었던 에세네파(Essenes)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을 입증할 만한 별다른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다. 요한은 에세네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요한은 곧 오실 메시아의 도래를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에세네파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행동했다. 또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민족적 구원을 시도했지만 에세네파 사람들은 사회를 외면하고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아울러 요한이 민족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를 집행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에세네인들은 개인 구원의 수단과 방법에 집착해 철저한 금욕적 생활과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또한 쿰란(Qumran) 공동체와 세례 요한을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아무런 증거는 없으며 또한 요한이 머물렀던 지역이 어느 곳인지도 정확히 확인되고 있지 않다. 여하튼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다(모세, 엘리야 등). 요한은 광야에서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보낸 후에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전파한다(3:2, Geldenhuys, Lief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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