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 57절부터 66절까지의 말씀은, 천사의 예언대로 늙은 사가라와 엘리바셋에게서 아들 세례 요한이 출생하는 장면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며 평탄케 하는 광야의 선지자 세례 요한의 출생으로 사가랴의 입이 열렸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을 개역개정 성경으로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57절-66절, 주석 및 해설 정리
누가복음 1장 57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엘리사벳이 … 낳으니
앞에서는 침례 요한과 예수의 수태에 관한 기사가 번갈아 가며 언급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그들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본 절은 5-25절에 이어 침례 요한의 탄생 기사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누가복음 1장 58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함께 즐거워하더라(쉬네카이론 아우테)
지속적인 즐거움을 묘사하기 위해 미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기쁨은 엘리사벳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 모두의 기쁨으로 옮아갔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앞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탄생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바, 본 절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1장 59절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할례(割禮)하러(페리테메인)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았는데, 구약 시대에 이 할례가 갖는 의미는 여러가지였다. 1.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 2.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표(삼상 17:26). 3. 여호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케 하는 표. 4. 신약 시대의 침례에 대한 예표등.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신체적으로만 할례를 받는 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소위 ‘마음의 할례’가 강조되었다(신 10:16, 30:6, 렘 4:4, 겔 44:7).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 하더니
생후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며 이때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었다(59절, 2:21). 따라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창 17:5), 야곱이 이스라엘로(창 32:28), 혹은 사울이 바울로(행 13:9) 칭하심받게 된 때는 그들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또한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에 이웃이 참여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유대 풍습이었고(릇 4:17)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도 유대의 한 풍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이 갖는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을 행사했으며(창 2:19, 20) 한 성읍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그 성읍에 대한 통치권 확보와 동일시되었다(삼하 12:28). 그리고 여자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자의 이름으로 칭해지길, 즉 남자의 보호 아래 놓여지길 구했으며(사 4:1), 하나님의 보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칭함받다’라고 표현되었다(사 63:19).
누가복음 1장 60절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아니라 요한이라
엘리사벳은 자신의 반대가 관습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또 여자의 견해라 하여 무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아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키’은 ‘정말로, 절대로 아니다’는 뜻이다. 엘리사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몇몇 주석가는 그녀가 남편 사가랴처럼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 주장한다(Meyer, Bengel). 그러나 그보다는 엘리사벳이 필담(筆談) 형식을 통해 사가랴가 받은 모든 계시의 내용을 전해받아 알았을 거라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Bruce, Plummer, Lenski). 원문에는 ‘우키’ 다음에 바로 ‘알라’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이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오히려’라는 뜻이며 부정어 ‘우키’와 함께 사용될 때는 ‘정반대로’의 뜻을 나타낸다. 한편,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 ‘요한’이라는 이름은 다음 몇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서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2.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64절). 3.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였다(3:10-14, 마 3:5-6).
누가복음 1장 61절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저희가 가로되 …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친척과 이웃 사람들의 생각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가문에서건 전승되는 이롬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가문 중에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계시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친족들은 관례적으로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짓기를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지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므로(15절) 그의 위대한 생애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였다.
누가복음 1장 62절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 부친께 몸짓하여 … 물으니
당시 사가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20절 주석 참조). 22절에서 누가는 ‘사가랴가 벙어리대로 있더니’라고 말하지만 사용된 단어 ‘코포스’은 ‘벙어리’뿐만 아니라 ‘귀머거리’를 의미하기도 한다(7:22).
누가복음 1장 63절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서판(書板)
표면에 밀랍(wax)을 얇게 칠한 작은 나무판(little-tablet)으로서 그곳에 첨필(尖筆)로 글을 썼다.
그 이름은 … 놀랍게 여기더라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에 대해서 사가랴의 의견을 물었을 때, 사가랴의 대답은 ‘요한이라’였다. 이것은 사가랴의 의견이 아니었다. 이것은 계시에 의해서 이미 주어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사가랴가 귀머거리였음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만일 사가랴가 엘리사벳과 주위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었었다면 부인 엘리사벳과 똑같은 이름을 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1장 64절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에 그 입이 … 찬송하니
사가랴의 믿음있는 단호한 태도와 순종은 결실을 맺고, 자신의 불신의 표적(sign)이었던 벙어리 상태에서 풀려나게 했다. 이로써 20절의 천사의 말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사가랴는 그 혀가 풀리어 말할 수 있게 되자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찬양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68-79절의 내용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며 지난 10여개월 동안 말 못했던 답답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크나큰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의 찬양이다. 아마 그는 장장 10여개월에 걸친 침묵의 기간 동안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신에 대해 뉘우침과 아울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도리를 절실히 배웠을 것이다.
누가복음 1장 65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다 두려워하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은 ‘공포’가 아니라 초자연적 사건에 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경외감’이다(12절 주석 참조). 주위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진 일을 목격한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의미이다.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는 예루살렘 주위의 한정된 지역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따라서 때때로 그 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하다. 유대 본령(本領)은 한 면이 약 70 km되는 거의 정방형(正方形) 모양이었다. 유대는 특히 ‘산지’로서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요새지가 600m에서 1,004m에 걸쳐 있다(헤브론의 북쪽). 이 지역은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광야’ 또는 ‘사막’ 지대로서 샘이 거의 없어 항상 인구가 적었다. 한편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바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산간 지역 일대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교역상(交易商)들이 항상 유대 주위를 통과했는데 이 교역상들을 따라 이 이야기가 점차 유대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누가복음 1장 66절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마음에 두며
헬라어에서 ‘마음’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문 또는 낭설로 여기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것이다(47, 51절 주석 참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이 아이가 선한 인물이 될지 악한 인물이 될지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 섞인 물음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은 구절 ‘주의 손’이 이 질문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손(케이르 퀴리우)
구약은 창조에 있어서나 역사진행 과정에 있어서 자주 하나님의 손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로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은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은 개개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왕상 18:46). 그러므로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한다는것은 곧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요한을 덧입히시며 돌보심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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