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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2025년 2월 넷째 주일 설교문]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23절,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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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여정, 예레미야애가 3장 19-23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 매일 새롭게 주시는 은혜, 크신 신실하심을 발견합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당신에게 새벽을 여는 희망의 빛을 선사합니다.

[2025년 2월 넷째 주일 설교문]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23절,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2025년 2월 넷째 주일 설교문]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23절,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23절,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주제:  고난과 절망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의 근거를 하나님의 성품에서 발견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으로 삶을 재정립하여 참된 소망을 얻는 길을 제시합니다.



I. 서론: 깊은 절망의 밤, 희미한 희망의 갈망

 

(밤바다 속의 등대)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인생은 예측 불가한 폭풍우를 만납니다. 한 어부가 짙은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절망했습니다. 거친 파도와 캄캄한 어둠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등대를 발견했습니다. 등대 불빛을 따라 그는 안전하게 항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절망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우리 삶의 등대와 같습니다. 그 빛을 따라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를 인도하는 영원한 빛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삶이라는 긴 항해 중에 짙은 안개와 거센 폭풍우를 만나 길을 잃은 듯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기치 못한 질병, 사업의 실패,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혹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회적인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심연에 잠기곤 합니다. 마치 어두운 터널을 끝없이 걸어가는 것처럼,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고 막막함만이 우리를 짓누르는 듯합니다. 특히 2025년을 벌써 두 달이나 보내는 이 시점에,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예레미야애가는 바로 이러한 절망의 깊은 밤을 그린 성경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를 잃고 폐허가 된 조국을 보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속에 눈물로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애끓는 절규는 마치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탄식과 같습니다. 3장에는 더욱 개인적인 고뇌와 슬픔이 담겨 있어,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과 깊이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에서 23절은 절망의 한가운데서 예레미야가 간절하게 던지는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고난과 재앙, 쑥과 쓸개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하는구나.” 그는 깊은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지만, 21절에서 놀라운 전환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으로 이것을 생각하므로 나는 소망을 얻으리라.” 예레미야는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갈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예레미야와 같은 질문을 던져봅시다.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적인 조건이나 일시적인 감정에서 찾을 수 없는, 진정한 소망의 근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소망은 바로 변함없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하며,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빛과 같습니다. 이제 말씀을 통해 절망의 깊은 밤을 헤치고 새벽을 여는 희망의 빛을 함께 찾아 나아가시겠습니다.



II. 본론: 새벽을 여는 네 줄기 희망의 빛

 

본론 1: 기억하되 낙심하지 말라 – 19-20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희망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짓누르는 절망의 무게입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초와 재난’(עָנְיִי וּמְרוּדִי 아니 우메루디), 히브리어 원어로는 ‘나의 가난과 방황’이라는 뜻입니다. 나라 잃은 백성의 비참함, 고향에서 쫓겨난 방랑의 고통, 그 모든 슬픔과 아픔을 그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고통을 ‘쑥과 담즙’(לַעֲנָה וָרֹאשׁ, 라아나 봐로쉬)이라고 표현합니다. 쑥은 쓴 맛의 대명사이고, 담즙은 극심한 고통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자신의 내면 깊숙이 사무치는 고통, 견디기 힘든 절망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하는지라…” 그렇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기억하면 마음이 낙심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예레미야처럼 우리의 고통을 직시해야 합니다. 아픔을 외면하거나 현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절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을 회피하려 할수록 절망은 더욱 깊어지고, 우리는 더욱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때로는 “괜찮아, 다 잘 될 거야”와 같은 피상적인 위로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진정한 희망은 고통을 외면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마주하는 용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자신의 고통을 숨김없이 토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을 향한 첫걸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통스러운 기억에만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하는지라.” 만약 우리가 고통스러운 기억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계속해서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억은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지만, 기억에 갇히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의 깊이를 인정했지만, 그 절망에 압도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억의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예레미야의 마음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다음 구절을 통해 함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론 2: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 – 22절

절망의 깊은 밤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던 예레미야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절망의 늪에서 그를 건져 올린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21절에서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이라고 고백했던 예레미야는, 이제 그 소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22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성도 여러분, 이 짧은 구절 속에 절망을 이기는 놀라운 희망의 빛이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을 떠올렸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라고 불리는 단어입니다. 이 ‘헤세드’는 단순한 인간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 사랑은 영원하며, 변함이 없고, 무조건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때로는 변덕스럽고 조건적이지만, 하나님의 ‘헤세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긍휼’(רַחַם, 라ㅋ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긍휼’은 어머니가 자녀를 품에 안듯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깊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넘어, 고통받는 자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고, 그를 구원하고자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신음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의 곁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헤세드’와 ‘긍휼’이 우리를 붙드시고 계시기에, 우리는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진멸되지’(תָּמַם, 타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짓누르고 절망하게 만드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져 더 이상 일어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진멸되지 않는 이유,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의 무궁한 ‘인자와 긍휼’에 근거합니다. 이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이 바로 절망의 어둠을 뚫고 나오는 첫 번째 희망의 빛입니다.

 

본론 3: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은혜 – 22절-23절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을 이기는 첫 번째 희망의 빛,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희망의 빛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22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긍휼, 즉 헤세드와 긍휼이 “무궁하심”(לֹא־כָלוּ, 로 칼루)이라고 선포합니다. ‘무궁하다’는 것은 끝이 없고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감정이 아니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풍성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의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선언입니다. 23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고 우리는 되뇌곤 합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때로 지루함과 무력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로 그 “매일 아침”에 새로운 은혜가 시작된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매일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혼돈과 흑암으로 가득했던 세상에 빛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부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매일 아침 새로운 빛으로 우리를 맞이하시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힘과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아침은 단순히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이 갱신되고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새벽 기도, 묵상과 같은 아침 시간의 영적 습관은 단순한 종교적인 의례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소중한 통로입니다. 바쁜 일상과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더욱 특별합니다. 어두운 밤의 고통과 불안을 지나, 새 아침의 햇살을 맞이할 때,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용기와 소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매일 아침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며 살아갈 힘을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처럼,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고, 매일 아침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론 4: 하나님의 크신 신실하심 – 23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두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 둘째는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두 가지 은혜는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 올리고 매일 새로운 소망을 품게 합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희망의 빛, 하나님의 크신 신실하심에 대해 묵상하며, 절망을 이기는 굳건한 믿음의 기초를 세워나가겠습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는 23절에서 망설임 없이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성실하심’은 히브리어로 ‘에무나’(אֱמוּנָה)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성실하다’, ‘신뢰할 만하다’는 의미를 넘어, ‘견고함’, ‘확실함’, ‘진실함’, ‘믿음직함’을 포함하는 훨씬 더 깊고 풍성한 의미를 지닙니다. 마치 커다란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확실함, 거짓 없이 진실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발견했습니다. 어미 새가 알을 품고 끈기 있게 기다리며 마침내 새끼를 부화시키는 모습, 태양이 매일 어김없이 떠올라 온 세상에 빛을 비추는 모습, 계절이 변함없이 순환하는 질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실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 끊임없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변덕스러움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신실합니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쉽게 변하고, 약속을 잊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시거나 저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성실하심은 우리의 삶의 확실한 기초가 됩니다. 마치 튼튼한 닻이 폭풍우 속에서도 배를 안전하게 지켜주듯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삶의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고 불안할 때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우리의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어떤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덕스러운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확실한 소망, 하나님의 크신 신실하심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 신실하신 사랑이 여러분의 삶의 가장 확실한 기초가 되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능히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결론: 하나님 중심의 관점, 영원한 소망의 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부터 23절 말씀을 통해 절망의 깊은 밤을 밝히는 네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를 진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 매일 아침 새롭게 부어주시는 은혜, 그리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크신 신실하심입니다. 이 모든 희망의 근원은 바로 우리의 세상적인 상황이나 감정이 아닌,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라고 속삭입니다. 자아실현, 자기만족을 쫓아가도록 부추기지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찾아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단순히 나에게 위로가 되는 구절만 찾는 피상적인 태도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관점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깨닫고,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여러분, 진정한 소망은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나 위로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어떠한 어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억하고, 매일 아침 새롭게 주시는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예레미야처럼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믿음의 여정을 기쁘게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를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베푸시며, 크신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무궁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